[딜사이트 김규희 기자]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은 대통령의 죽마고우라는 수식어를 달기 전에도 행내에서 존경할 만한 선배이면서 결단력이 있는 리더십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 산업은행에 입행한 이후 30년 넘게 일하면서 쌓은 그가 쌓은 브랜드는 후배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선배로 각인됐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그는 행내 감사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재명 정부 들어 내부 출신 회장이 된 그는 조직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꿰뚫어 조직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특히 취임 후 단행된 고위급 인사에서는 박상진 회장 특유의 정무적 판단과 관리 철학이 나타났다. 특히 인사 판단을 통해 노조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조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얻는다.
눈길을 끈 대목은 혁신성장금융부문장 내정 철회 건이다. 당초 박상진 회장은 김사남 산업은행 벤처금융본부장을 내정했다. 그러나 산업은행 노조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고, 노조는 부산 이전에 적극적이었던 김사남 내정자의 과거 행보를 문제 삼았다.
노조가 인사 문제를 기화로 단체 행동까지 불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박 회장은 그 의견을 전격적으로 수용해 내정을 철회하고 산은 뉴욕지점을 이끌던 윤태정 지점장을 새 내정자로 발탁했다. 이재명 정부가 노조를 국정 파트너로 존중하는 것처럼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면서도 불필요한 내부 갈등을 사전에 차단한 셈이다.
하지만 박 회장이 단순히 노조에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석부행장 인사에서는 노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봉희 부행장 임명을 단행하면서 인사권자로서의 원칙을 세웠다. 이봉희 부행장은 과거 회장 비서실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산은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을 보좌해온 인물이다. 전임 회장들로부터 복수의 추천을 받은 이봉희 부행장 카드를 밀어붙이면서 위계질서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취임 초 노조와 허니문 관계를 설정한 박상진 회장은 그러나 최근 정치권에서 다시 불기 시작한 지방 이전 바람이라는 변수를 맞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을 강력히 추진했던 동력이 대통령 탄핵과 이재명 정부 출범으로 잠잠해졌다가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상할 기미를 보이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부산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난해 말 해양수산부 이전을 단행했고 최근에는 주요 해운사들의 부산 거점 마련을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맥락의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 국정의 핵심 기치로 나타나면서 산업은행을 비롯해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 금융기관들이 다시 지방 이전의 핵심 타깃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2차 공공기관 이전의 화두를 금융기관 통폐합 및 이전 논의와 맞물려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상진 회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곁에서 정책금융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이전할 경우 전문 인력 유출과 금융 경쟁력 약화 등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문제를 피력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40년 지기인 대통령에게 정책금융의 효율성을 강조하며 본점 사수의 당위성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거대 담론을 본격화할 경우 정책금융의 수도권 존재 의미는 무력해질 수 있다.
정치권의 기류 변화에 산업은행 노조도 다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노조는 박상진 회장이 대통령을 설득할 것이라고 믿지만 국가정책과 사사로운 인연을 결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봉합했던 노사 관계도 외부의 정치적 파고에 다시금 긴장 상태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상진 회장은 경영권 관련 지분을 보유한 해운사 HMM 매각을 최근 화두로 제시하면서 여론을 달래고 있다. 오는 3~4월 중 HMM 본사의 부산 이전을 추진해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박상진 회장은 취임 초부터 늦은 밤이나 주말에 홀로 산은 본점 건물을 거니는 소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텅 빈 복도를 돌며 야근 중인 직원이나 주말에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는 후배들을 발견하면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직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후배들을 진심으로 다독이는 그의 모습에서 행원들은 큰 리더십을 느낀다는 전언이다.
금융권은 박상진 회장이 주도하는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집행 과정에도 주목한다. 산업은행은 최근 국민성장펀드를 활용해 삼성전자에 2조5000억원 가량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결정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방선거를 의식해 대기업 지원을 보류했다가 다시 반도체 산업 장려를 위해 거래를 곧바로 재개하면서 정무적 판단을 올바로 세웠다는 평가다. 수도권 대기업 지원이라는 논란을 피하면서도 신산업 육성을 위한 자금을 적재적소에 배분하는 것은 리더십의 결단이 필요한 문제다.
산은 관계자는 "박상진 회장은 온화한 신사의 품위를 갖췄지만 인사나 정책 집행에 있어서는 상당히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라며 "지방 이전이라는 정치적 압력을 앞두고 어떤 묘수를 낼 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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