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규희 기자] 지난해 12월 정부 업무보고가 마무리되던 시점 회의장 주변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식 일정이 끝났음에도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이 자리를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배석했던 장관들과 참모들을 먼저 내보낸 뒤 박 회장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독대하는 모습이 포착되자 관가는 술렁였다. 대통령 측근들조차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는 후문이다. 장관급 인사들과 금융공기관 수장들 조차 부러운 눈초리였다. 공식적인 국가 업무보고 자리에서 특정 기관장이 대통령과 단독으로 마주 앉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날 독대를 두고 정관계에서는 예견된 일이었다는 반응이 나온다. 박 회장은 2025년 이재명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경제1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찌감치 요직 등용이 전망됐다. 당시 인수위 관계자에 따르면 박 회장의 산은 회장 내정은 이미 인수위 시절부터 공공연한 관측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회장은 인수위 내부에서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챙기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산업은행에 대해 가진 해박한 지식은 대부분 박 회장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박 회장은 인수위 시절 산업은행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 재무 구조 그리고 민감한 현안들을 이 대통령에게 수시로 직접 보고했다. 특히 산업은행 본점의 부산 이전 문제를 두고 박 회장은 이 대통령에게 이른바 족집게 과외를 하듯 상세한 실무 보고를 올렸다. 이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력 유출 리스크와 지역 경제 파급 효과 등을 세밀하게 분석해 대통령의 정무적 판단을 도운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40여 년 전 중앙대학교 사법고시반 수성관 시절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은 중앙대 법대 82학번 동기로 고시라는 동일한 목표를 세우고 만났다. 특히 지독한 가난을 등에 업고 공부에 매진하던 처지였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매일밤 법전과 씨름했던 동지였다는 설명이다.
운명이 갈린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공부를 이어갔지만 박 회장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며 당장의 생계가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결국 고시를 접고 1990년 산업은행 취업을 선택했다. 꿈을 포기해야 했던 아쉬움이 컸을 법도 하지만 박 회장은 오히려 친구의 꿈을 응원하는 든든한 조력자로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에 입행한 박 회장은 첫 월급을 타자마자 가장 먼저 고시촌에 남은 이 대통령을 찾았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다.
박상진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림동 고시촌을 찾아 이 대통령을 격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이 번 돈으로 친구의 고시 생활을 뒷바라지한 셈이다. 이 대통령이 훗날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준 친구 중 한 명으로 박 회장을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할 때 맺은 인연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빈천지교의 전형이라는 평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이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도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박 회장은 이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할 때나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경제 분야의 코치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의 발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코드 인사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금융권 내부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산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부 출신인 데다 대통령과의 직통 채널을 갖췄다는 점이 오히려 강력한 정책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30년 넘는 산은 경력을 바탕으로 한 실무 능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추진하는 150조원 규모의 대규모 정책 금융 집행에 있어 박 회장은 단순한 집행자를 넘어선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에 대해 이 대통령이 깊이 신뢰하는 경제 멘토 중 한 명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박 회장의 산은 내부 사정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 사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부산 이전 문제나 대규모 자금 집행 시기를 결정할 때 박 회장의 정무적 판단을 상당히 신뢰한다고 전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과 산은 회장의 관계가 이 정도로 각별한 사례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며 "박 회장이 단순한 관리자를 넘어 정권의 핵심 경제 파트너로서 예우받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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