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통합 대한항공은 이제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로, 세상에 볼 수 없었던 새롭고 멋진 항공사로 거듭날 것입니다. 모두의 마음 속에 가장 깊이 기억되는 항공사,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항공사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11일 저녁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개최된 '라이징 나이트(Rising Night)' 환영사를 위해 무대에 오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평소보다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재계에서 알아주는 '샤이보이'인 조 회장이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통합 대한항공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8년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축하의 마음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기자가 항공업계를 처음 출입했을 당시 조 회장은 대한항공 총괄부사장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전격 승진하며 '3세 경영체제'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을 제외하고, 겸직 중이던 계열사 대표이사직에서 모두 사임하며 말 그대로 '올인'했다. 그는 공공연한 후계자였지만, 누나·여동생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의 대표 취임 1년 만에 사상 최대 순이익(2017년)을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조 회장이 왕좌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연일 터지는 이슈에 출입기자들 역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2018년 하반기 갑작스럽게 등장한 행동주의펀드 KCGI는 조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공격했다. 고(故) 조양호 선대회장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환이 악화되면서 별세했고, 조 회장은 누나 조 전 부사장과 대립하는 아픔을 겪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조 회장은 그 누구보다도 힘들게 대기업 총수가 됐다. 언론은 준비되지 않은 총수를 향해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일침을 던졌다.
설상가상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글로벌 항공사들은 유례없는 존폐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아시아나항공 원매자였던 HDC현대산업개발이 인수를 포기했고, 아시아나항공 채권단은 조 회장에게 인수를 제안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이 휘청이는 상황에서 통합을 결정했다. 과거 한진해운이 파산한 이후 세계 해운업 시장에서 국내 해운업계의 입지가 좁아진 선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을 터다.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30년간 앙숙 관계를 맺어온 양사 직원들은 결사반대를 외쳤고, 막대한 부채를 떠안는 것을 우려한 주주들은 항의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 절차는 자꾸만 삐걱거렸고, 피로감이 고조되면서 통합 회의론까지 부상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를 포함해 총 14개의 필수국가에서 기업결합 승인을 받아내기까지는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켠에서는 조 회장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순수하게만 보지 않았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정부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에서다. 산업은행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대금 지원을 위해 한진칼 지분을 취득했고 사실상 잠재적 우군으로 분류됐다. 의도야 어찌됐건 조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계기로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 회장은 숨 돌릴 틈이 없다. 통합 대한항공이 가장 사랑받는 항공사가 되려면 안전과 서비스 등 질적 성장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규 기업이미지(CI)와 로고를 공개하면서 새로운 기내식과 업그레이드된 기내 물품을 선보인 배경에는 통합 이후 오히려 품질이 하락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가 약속한 것처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의 차별 없는 융화를 이끌어야 한다.
대한항공이 2027년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 절차를 마무리 지으면, 국내 유일의 대형항공사(LCC)와 국내 최대 저비용항공사(LCC)를 보유한 항공그룹으로 거듭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조 회장은 한진그룹 창업주와 부친이 지켜온 '수송보국(수송으로 국가에 기여한다)' 이념을 계승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차원 진화시키게 된다. 대승적으로는 국가기간산업인 항공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국민 혈세까지 지킬 수 있게 됐다.
결국 조 회장은 왕관의 무게를 버텨냈다. 이번 라이징 나이트 행사가 조 회장이 6년 만에 치른 뒤늦은 대관식처럼 느껴지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2019년 4월 조 선대회장의 장례가 끝난 지 약 8일 만에 회장에 오르며 별도의 취임식을 가지지 못했다.
언론은 태생적으로 기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조 회장이 취임 이후 얼마나 고된 나날을 보내 왔는지를 고스란히 지켜본 기자는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도약에 나서는 한진그룹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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