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올해로 창립 72주년을 맞은 화승그룹이 좀처럼 중견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재계 20위권에 이름을 올리던 화승그룹은 현재 사업형 지주사 역할을 수행하는 화승코퍼레이션을 비롯해 총 68개의 계열사를 보유 중이다. 하지만 자산총계가 5조원을 크게 밑돌면서 공정거래위원회가 정한 '준대기업' 요건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 상장 4개사 총 매출 7조원 안팎…총자산 2조원 미만
18일 재계 등에 따르면 화승그룹은 ▲화승코퍼레이션 ▲화승알앤에이 ▲화승인더스트리 ▲화승엔터프라이즈 총 4개 상장사와 ▲화승T&C(화승티엔드씨) ▲화승케미칼 ▲화승네트웍스 등 총 64개 국내외 비상장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화승그룹 지배구조 상단에 위치한 화승코퍼레이션은 2021년 진행된 화승알앤에이 인적분할에 따른 존속법인으로, 투자 부문과 산업용 고무사업 부문을 영위한다. 지금의 화승알앤에이는 신설법인으로 기존의 자동차 부품 사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신발과 화학, 유통 및 금융부문으로 구성된 화승인더스트리는 화승엔터프라이즈를 지배하고 있다.

상장 4개사의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을 단순 합산하면 약 7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2023년 매출 총합(5조원)보다 약 40% 증가한 규모다. 예컨대 잠정 실적을 발표한 화승인더스트리와 화승엔터프라이즈의 경우 매출이 각각 전년 대비 27.4%, 32.6% 증가한 1조8677억원, 1조6096억원으로 집계됐다. 화승코퍼레이션과 화승알앤에이는 지난해 3분기까지 전년과 유사한 수준을 보였는데, 이로 추정한 두 회사의 지난해 연간 매출은 1조6000억원, 7000억원 안팎이다. 여기에 비상장 계열사 매출까지 포함하면 매출은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화승그룹의 총자산은 성장률이 더딘 모습이다. 상장 4개사의 지난해 3분기 말 별도 합산 자산총계는 1조6654억원으로, 2023년 말 1조5969억원과 비교할 때 4.3% 확대되는데 그쳤다. 공정거래법상 자산 규모가 5조원 이상 10조원 미만일 경우 공시대상기업집단(준대기업집단)으로 분류되며, 총 자산이 10조원을 넘어야 대기업으로 분류된다.
특히 화승코퍼레이션만 놓고 볼 경우 자산총계는 지난해 3분기 말 연결기준 1조2199억원에 불과하다. 별도기준으로는 4763억원이다. 특히 총자산 대비 보유한 자회사 주식가액 비중을 의미하는 지주비율은 약 40%로 나타났다. 이 회사가 사업형 지주사를 표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공정거래법상 요건인 ▲총자산 5000억원 이상 ▲지주비율 50%를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현승훈 회장, 1977년 경영권 승계…1986년 '토종 브랜드' 르까프로 고공성장
화승그룹 모태는 1953년 8월 고(故) 현수명 창업주가 부산에 설립한 동양고무공업(㈜화승)이다. 당시 한국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고무신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부산을 중심으로 고무신 업체들이 생겨났다. 현 창업주는 한국전쟁 휴전(1953년 7월) 직후 '동자표' 고무신을 생산하며 빠르게 회사를 키워나갔다.
오너 2세이자 창업주 장남인 현승훈 회장(1942년생)은 1970년 ㈜화승으로 입사해 경영 수업을 받았다. 특히 화승그룹은 1969년 풍영화성(화승인더스트리)과 1971년 대보(화승T&C), 1978년 동양화공(옛 화승알앤에이) 등 계열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그룹 체계를 갖췄다.

현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77년이다.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35세의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현 회장이 공식적으로 그룹 회장에 오른 것은 2년 뒤인 1979년이며, 1980년부터 그룹 계열사 사명을 지금의 '화승'으로 바꿨다. 이 시기 부산은 글로벌 신발 브랜드의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 생산기지로 이름을 떨치며 전성기를 누렸다.
㈜화승 역시 오랜 기간 유명 브랜드에서 전수 받은 신발 제조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었다. 현 회장은 OEM 신발 제작에서 벗어나 토종 브랜드 육성을 꿰했고, 1986년 '르까프' 브랜드가 탄생했다. 화승그룹은 신발 제조 뿐 아니라 무역, 화학, 건설,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에 출사표를 던지며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고, 1980년 들어 재계순위 22위에 오르기도 했다.
◆ 2015년 '르까프' 매각…주력 사업 '차부품·정밀화학' 재편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과 1997년 발발한 IMF 외환위기가 맞물리면서 화승그룹은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게 된다. 모기업인 ㈜화승과 ㈜화승 자회사인 화승상사가 부도를 맞으며 그룹 전반으로 자금난이 번진 것이다. 1998년 화의인가를 받은 ㈜화승은 고강도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에 나섰다. 화승제지와 화승강업 등 알짜 계열사도 팔아 현금을 조달했다. 현 회장은 사재 50억원을 투입하며 그룹 회생에 총력을 기울였다. 화승그룹은 7년 만인 2005년 화의를 졸업했지만, 사세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생존에 성공한 화승그룹은 제2의 도약을 위해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영 전략을 제시했다. 세부적으로 ▲자동차부품 ▲정밀화학 ▲스포츠브랜드 3가지를 주력 사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화승그룹은 2015년 돌연 ㈜화승을 매각하며 다시 한 번 사업 재편에 나섰다.
이를 두고 경영권 승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현 회장은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는데, 추후 오너 3세 경영을 위해 사업을 이분화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현 회장 장남인 현지호 총괄부회장은 자동차부품사인 화승코퍼레이션 최대주주이며, 차남인 현석호 부회장은 스포츠패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및 정밀화학사인 화승인더스트리 최대주주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