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창 편집국장]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안데르센 동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판타지 소설, 게임 등으로 끊임없이 탄생한다. 뻔히 아는 내용임에도 그 스토리는 각색·윤색되고 때로는 화려한 CG기술이 입혀지면서 왕성하게 재생산되고 소비된다. 특히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북유럽 신화도 마블의 손을 거쳐 '토르'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한 두 개가 스토리만 맹위를 떨치면 우리의 상상력은 특정 이미지로 고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용이나 반인반수(半人半獸)를 사악한 대상으로 여긴다. 또, 인어라고 하면 공주만 떠올린다. 반면, 동양에서는 용은 신성한 동물이다. 반인반수도 숭배의 대상이다. 중국 고전이자 상상력의 보고(寶庫)인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저인(氐人)이라는 인어 아저씨가 등장한다.
정재서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를 상상력의 제국주의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대상이나 스토리를 상상해야 하는데 많은 이미지가 획일화돼 있다는 설명이다. 산업화·근대화 물결 속에 다양한 문화를 습득해 체내화하고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과정이 생략됐다. 서양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막강한 자본과 결합한 서양 스토리가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상상력이 획일화돼 있으면 유행을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유행의 틀 안에서 같은 사고를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지난해부터 과일꼬치에 설탕물을 굳힌 탕후루가 유행이다. 미치도록 단맛 탓에 건강을 걱정하는 부모들이 가게 앞에서 애들과 씨름하는 장면도 흔히 보게 된다. 그만큼 탕후루 가게가 많아도 너무 많다. 이제 막 창업한 사장님들께는 미안하지만, 탕후루도 과거의 조개구이, 찜닭 전문점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치킨집 옆에 치킨집'도 상상력의 한계다.
소위 국가 경제를 이끈다는 대기업도 다르지 않다. 어떤 제품이 인기를 끌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면 너도나도 뛰어든다. 극히 일부만 성공하고 대다수는 돈만 쓰고 떨어져 나간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유행을 쫓는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그 유행이 거대한 산업 물결이라면 대기업은 목숨 걸고 따라가야 한다. 대기업 일부는 기술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기도 하고 일부는 부품 하청업체로 명맥만 유지하기도 한다.
최근 산업계 소식을 접하자면 삼성, LG, SK 등 국내 대표 대기업의 운명이 미국 보조금에 달려 있는 듯하다. 여전히 메모리 반도체 초강대국인데 시스템 반도체 등 비메모리 반도체가 맹위를 떨치면서 갑자기 약소국으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메모리 반도체 공장도 앞으로 미국에만 지어야 할 판이다. 미국이 자국내 기술과 생산시설 유치에 막대한 보조금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배터리는 반도체보다 더 하다. 완전히 천수답(天水畓) 신세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배터리 산업의 미래가 크게 바뀔 운명에 놓여있다. 테슬라의 전기차 점유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현대차가 이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내 배터리 업체는 여전히 보조금 타기에 사활을 건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덩치를 키운 중국산 전기차, 배터리 공세에도 대비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배터리와 반도체 산업 지형이 크게 바뀐다.
메모리 반도체를 선도했으나 비메모리 반도체 유행은 따라가지 못했다. 배터리 유행에 잘 안착했으나 미국 정책과 중국 공세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빠르게 쫓아가고 있으나 혁신 기술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다. 또 다른 환경오염원인 배터리의 전기차가 아닌 다른 동력원을 상상해보자. 쫓기 힘든 비메모리 분야가 아닌 양자 컴퓨팅 시대를 선도하는 미래도 그려보자.
정재서 교수는 상상력의 다원화를 요구했다. 서양 고전이 아닌 동양 고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이 뭐하는지만 엿봐서는 상상력의 결과물을 얻기는커녕 조개구이, 찜닭 전문점 신세를 면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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