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오동혁 IB부장] 10년쯤 전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한 왕자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현지 대규모 프로젝트에 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거물로 기억된다. 한국기업 수주 등 건설쪽 주제를 주로 다뤘다. 공식 질의응답 후 중동에 어떤 산업이 진출하면 유망할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당시 제대로 된 답변을 못했다. 필자도 잘 몰랐기에. 찜찜한 마음을 뒤로 리야드 시내로 나섰다. 승합차를 타고 가던 중 신호를 받고 잠시 정차했다. 옆차선에 스쿨버스가 나란히 멈췄다. 차창 밖을 무심코 보던 찰나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10대 소녀들.
"아 유 코리안?"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임을 먼저 묻는 것에 당황한 것도 잠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쏘리 쏘리~." 서로 입을 맞춰가며 가수 슈퍼주니어의 노래를 부르는 것아닌가. 두 손바닥을 비비는 특유의 안무와 더불어. 얼핏 봐도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앨범이 나온지 3~4년쯤 지났던 때 같다. 동남아에서 대박을 쳤단 뉴스는 수차례 접했지만, 멀리 사막 한복판에서까지 이럴 줄이야. 놀라운 경험은 이후 술자리에서 사우디 얘기가 나올때 마다 안주로 우려 먹었다. 그때만해도 "못 믿겠다", "잘못 들은 것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10년이 흐른 현재. 이젠 중동이든 남미든 또는 아프리카든, 한국 가수 노래를 듣는 건 더는 어렵지 않다. 케이팝은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대세로 자리매김 했다. 국내 한 기관은 얼마전 10년 새 북아프리카·중동지역 한류팬이 130배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기가 저변으로 확산되다 보니, 굳이 현장을 찾아 확인할 필요도 없어졌다. 방구석에서 조차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수많은 여행 유튜버들 덕분이다. 시각적으로 생생히 현지 상황을 보여준다. 한국인임을 밝히면 꼭 따라붙는 한마디가 마치 공식 같다. 두 유 노 비티에스?"
케이 콘텐츠의 마력은 오일머니까지 끌어당기고 있다. 올 초 빈 살만 왕세자펀드로 알려진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싱가포르투자청(GIC)과 함께 총 1조2000억원을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투자했다. 역대 최대 규모 펀딩이다. 엔터, 게임 등에 대한 높은 관심이 반영된 결과다.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 이후엔 정부기관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올 7월 모태펀드 운용기관인 한국벤처투자는 '사우디벤처투자(SVC)'와 업무합의각서(MOA)를 체결했다. 공동펀드 조성 및 벤처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협력하려는 의도다. 여기엔 콘텐츠도 한축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운 좋게도 사우디에서의 '케이팝 씨앗'을 일찍 목도했다. 그때 본 씨앗이 오랜 기간 자양분을 빨아들여 결국 꽃을 피워낸 듯 하다. 당시 버스 안 학생들은 이젠 20대를 훌쩍 넘겼을 것이다. 그들의 동생, 조카 또는 자녀는 보다 자연스운 환경에서 케이팝에 스며들었을 게다.
척박한 토양에 어렵게 핀 꽃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시들지 않게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중소기업부, 한국벤처투자 등 유관기관의 역할이 보다 절실하다. 민간 주도 교류도 한층 활성화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사막에 케이팝 꽃이 만발하길 기원한다.
이따금씩 사우디 왕자와 그의 질문이 생각난다. 우물쭈물 했던 필자 자신도 떠오른다. 시험지 걷어간 마당에 답안이 생각나봤자 무슨 의미 있겠냐마는. 돌이켜 보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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