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노연경 기자] 애경그룹이 앞선 두산의 대대적인 사업재편 행보를 따라가고 있다. 최근 제주항공으로부터 시작된 그룹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모태인 애경산업 매각까지 추진하고 있어서다. 그동안 두산과 마찬가지로 소비재기업으로 성장해온 애경그룹은 애경산업을 팔고 나면 화학·항공업 중심의 B2B(기업간거래)기업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애경그룹은 현재 삼정KPMG를 주관사로 선정하고 애경산업 매각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매각 대상은 AK홀딩스, 애경자산관리 및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애경산업 경영권 지분 63.38%다.
애경산업은 그룹의 모태이자 '캐시카우'를 책임져왔던 주력사다. 애경그룹의 모태는 1954년에 설립한 애경유지공업이다. '세제'라는 개념이 없던 1950년대에 애경그룹은 세탁비누를 팔아 성장했다. 1970년 채몽인 창업주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 아내인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1972년부터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지금의 그룹을 일궈냈다.
화학을 전공한 장 회장은 그룹을 맡으면서 원가절감과 품질관리, 설비투자 확대를 적극 추진했다. 특히 1985년 애경산업을 애경유지로부터 분리 독립해 치약 브랜드 '2080'을 만드는 등 국내 대표 생활용품기업으로 키워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에이지투웨니스, 루나 등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며 화장품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생활용품과 급성장한 화장품사업을 기반으로 애경산업은 2018년 코스피 입성에 성공했다. 애경산업이 시장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은 덕에 애경그룹은 이를 기반으로 유통(AK플라자), 항공(제주항공) 사업에도 뛰어들 수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코로나19) 위기로 성장세가 둔화하긴 했지만 애경산업은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최근 5년간 1945억원의 영업이익을 창출하며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애경산업 매각에 나선 이유는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타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풀이된다. 그룹 지주사인 AK홀딩스는 AK플라자와 제주항공 등 계열사의 경영난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4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게 됐다. AK홀딩스의 부채비율은 연결 기준 2020년 233.9%에서 2024년 328.7%로 뛰었다.
높은 부채비율도 문제지만 그룹의 상장사 네 곳의 주가가 1년새 반토막 나면서 자금을 융통할 길마저 막히고 있다. 애경그룹은 자금조달을 위해 주식담보대출을 이용했다. AK홀딩스와 애경자산관리가 보유한 애경산업 지분 63.16%와 제주항공 지분 53.59% 대부분이 담보로 잡혀 있다. 주담대는 대출 실행 시 주가에 따라 담보 비율을 정하는데 주가가 떨어져 담보 비율을 하회할 경우 추가 담보 요구(마진콜)나 반대매매(강제매각)를 당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채권자가 대주주 지분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리스크에 직면한 셈이다.
시장에서는 애경그룹이 앞선 두산의 행보처럼 모태사업을 매각한 뒤 화학과 항공을 중심으로 다시 사업을 재편할 것으로 보고 있다. 두산 역시 오비맥주, 코카콜라, 버거킹 등 소비재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겪으며 B2C(기업대소비자)기업에서 B2B기업으로 거듭났다.
당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던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알짜기업은 남기고 부실기업만 팔려고 하면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없다는 지론 아래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부 바꾸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두산그룹은 이때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을 때도 알짜기업인 두산인프라코어와 상징과도 같은 두산타워를 매각하며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애경그룹이 애경산업을 매각하면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6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에 확보한 현금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주력사업 성장은 물론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시장 한 관계자는 "B2B사업은 B2C사업과는 달리 산업의 사이클이 길기 때문에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하면 오래 버틸 체력이 필요하다"며 "애경산업이란 캐시카우가 사라진 이후 B2B에서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낼지 관건이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한편 애경산업 관계자는 매각과 관련해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포트폴리오 재조정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며 "그 중 하나로 애경산업 매각도 검토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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