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K-금융의 글로벌 행보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외 진출은 이제 주요 금융사에 단순한 기회 모색이 아니라 핵심 사업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탄탄한 해외 실적은 '생산적 금융'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서 선순환적 수익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딜사이트는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각 거점에서 펼쳐지는 국내 금융사의 현지 사업과 전략,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 주]
[부다페스트(헝가리)=딜사이트 한진리 기자] KDB산업은행의 헝가리 현지법인 ‘KDB유럽’(KDB Bank Europe)이 한국 기업 지원을 넘어 유럽 현지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금융 영토를 넓히고 있다. 최근 2년간 대출자산을 44% 늘린 가운데 전체 대출의 99%를 기업금융에 집중하며 현지 은행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직접대출뿐 아니라 신디케이트론 주선 역량을 바탕으로 중·동부유럽에서 서유럽과 역외시장까지 영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KDB유럽의 외형 성장세는 대출자산에서 두드러진다. 총자산은 2023년 말 10억6750만달러에서 2024년 말 10억7680만달러, 2025년 말 12억5290만달러로 증가했다. 2023년 말과 비교하면 약 17.4% 늘어난 규모다.
대출자산의 증가세는 더욱 뚜렷하다. 같은 기간 6억5700만달러에서 7억9300만달러, 9억4600만달러로 늘었다. 2년간 증가율은 약 44%다. 총자산에서 대출자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2023년 말 61.5%에서 지난해 말 75.5%로 14.0%포인트 높아졌다. 자산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기업대출 확대가 이끈 셈이다.
특히 기업대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난해 말 대출자산 9억4600만달러 가운데 기업대출은 9억3700만달러로 전체의 99%를 차지했다. 나머지 900만달러는 과거부터 보유해 온 개인대출로 현재는 신규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대출 포트폴리오 전반이 기업금융에 집중된 구조다.
◆한국 기업 지원 넘어 현지기업 공략…신디케이트론 주선 강점
KDB유럽의 영업 대상은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럽 현지기업을 대상으로도 직접대출과 신디케이트론 등을 취급하며 고객 기반과 수익원을 넓히고 있다. 지역별 포트폴리오 역시 헝가리와 독일 등 중·동부유럽 및 서유럽을 비롯해 중동과 코카서스 국가까지 확대하고 있다.
특히 KDB유럽은 신디케이트론 주선 역량을 현지 기업금융 시장에서의 차별화 요소로 내세우고 있다. 유럽에 진출한 국내 은행들이 현지 주요 은행이 주선하는 신디케이트론에 참여하는 방식의 영업 비중이 높은 반면, KDB유럽은 오랜 기간 축적한 주선 실적(Track Record)을 바탕으로 중·동부유럽 우량 차주를 발굴하고 한국계 은행들에 신디케이션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산업은행이 카타르 소재 은행을 대상으로 1억달러 이상 규모의 신디케이트론을 성공적으로 주선한 사례도 있다.
이희준 KDB유럽 행장은 “국책은행의 해외법인인 만큼 한국계 기업에 대한 지원은 기본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면서도 “은행으로서 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유럽 현지기업에 대한 대출 역시 중요한 업무”라고 말했다.
KDB유럽은 단순히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창구에 머무르지 않고 현지 금융시장에서 직접 고객을 발굴하고 거래를 주선하는 은행으로 영업 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계 기업 지원이라는 정책금융 역할과 현지기업 대상 수익사업을 병행하는 구조다.
◆30년 현지 영업 기반…독립법인 체제로 유럽시장 공략
KDB유럽은 1995년 대우은행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산업은행이 2002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우은행 지분 100%를 인수하면서 2003년 KDB Bank(Hungary)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2013년 KDB Bank Europe으로 은행명을 변경했다.
KDB유럽의 차별점은 헝가리에서 은행업 인가를 받은 독립 현지법인이라는 데 있다. 한국 본점의 해외지점과 달리 별도 자본과 인력을 기반으로 기업금융 업무를 수행한다. EU 금융 규제 체계 아래 헝가리를 거점으로 다른 유럽 국가의 금융거래에도 참여하고 있다.
올해 6월 말 기준 KDB유럽의 직원은 총 143명으로 산업은행 본국 파견직원 7명과 현지 직원 136명으로 구성돼 있다. 영업뿐 아니라 재무와 리스크관리, 준법감시, 정보기술(IT) 등 은행 운영에 필요한 조직을 현지에 갖추고 있다.
이희준 KDB유럽 행장은 “해외지점은 본점에서 여러 기능을 담당할 수 있지만 현지법인은 은행 운영에 필요한 조직을 자체적으로 갖춰야 한다”며 “현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이 주요 업무를 맡고 있고 이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은행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법인 체제는 유럽 금융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업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30년 넘게 쌓아온 현지 네트워크와 기업금융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계 기업 지원과 유럽 현지기업 영업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EU 자금 유입에 금융시장 기대감
KDB유럽의 영업 기반이 확대되는 가운데 헝가리 금융시장에도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페테르 머저르가 이끄는 티서당이 승리하면서 빅토르 오르반 전 총리의 16년 집권이 막을 내렸다. 새 정부가 EU와의 관계 개선과 재정·제도 개혁에 나서면서 그동안 동결됐던 EU 지원금도 다시 풀리고 있다.
지난 7월 EU 이사회는 약 100억유로 규모의 헝가리 경제회복·복원력 계획을 승인했다. 보조금 약 65억유로와 대출 약 35억유로로 구성된 자금으로, 개혁 및 투자계획 이행과 관련 요건 충족에 따라 집행되는 구조다.
정권 교체 이후 EU 자금 지원이 재개되면서 인프라와 에너지 분야의 투자 확대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헝가리 정부는 최근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기업의 전력비용을 줄이기 위한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방침을 밝혔다.
이는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헝가리에는 SK온과 삼성SDI, 에코프로비엠 등 국내 배터리 관련 기업들이 진출해 제조업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EU 자금이 에너지·인프라 확충과 산업 투자에 투입되면 관련 기업의 설비투자와 운전자금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KDB유럽에도 기존 한국계 기업뿐 아니라 현지 투자사업에 참여하는 유럽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거래를 확대할 기회가 열리는 셈이다.
새 정부의 정책 변화가 모든 제조기업에 호재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헝가리는 재정적자 부담을 안고 있는 데다 환경 규제 강화가 배터리 등 제조업체의 비용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유럽 전기차 시장의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도 변수다. 헝가리 경제에서 비중이 큰 자동차·배터리 산업의 회복이 지연되고 있어 신규 투자 확대와 기업금융 수요 증가가 어느 정도 속도로 나타날지는 업황 회복에 달려 있다.
KDB유럽은 한국 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과 유럽 현지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업금융 영업을 병행하며 사업 기회를 넓힌다는 방침이다. 헝가리의 정책 변화와 EU 자금 유입에 따른 신규 금융 수요를 발굴하는 동시에 중·동부유럽에서 축적한 신디케이트론 주선 역량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수익 기반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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