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김민기 산업1부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즉생(死卽生)'은 그간의 사법리스크를 뚫는 오랜 기다림 속에 나온 인내의 메시지다. "우리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야 할 삼성전자는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반성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진단은 얼마나 오랜 시간 이 메시지를 준비하고 다듬어 왔는지 가늠케 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말부터 한 달여간 진행된 임원 교육자료에서 이 회장의 육성으로 직접 전달된 것이 아니라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공개된 것이 언론에 나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재용 회장의 모든 메시지는 삼성전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는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와 커뮤니케이션실에서 나온다. 이재용 회장이 지난 2월 부당합병 항소심(2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이후 3월17일 메시지가 나온 것을 보면 오랜 시간 사즉생의 메시지와 메시지 전달 방식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평소에 차분하고 온화하며, 탈권위주의적이고 낮은 자세로 소통하는 이미지다. '사즉생'과 '독한 삼성'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이 회장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 그렇기에 임원 교육에서 3분 분량의 영상으로 성우의 내레이션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삼성에게는 '미래 지향', '사회적 책임'과 같은 다소 부드러운 메시지보다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고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경쟁사를 눌러 '초격차'를 통해 상대의 거센 추격을 따돌리는 과거의 삼성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은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 등 경쟁사에게 선두를 내주는 등 자존심에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삼성은 '절박함'을 통해 변화와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 현재 삼성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해 새로운 기술 개발에 무뎌졌고, 미래 시장을 선점하는 데 안일하다. 최근 몇 년 간 대규모 인수합병(M&A) 시도는 보이지 않았고 시스템 반도체와 AI, 전장 사업 등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움직임도 크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회장의 '사즉생'은 낡은 관행과 안일함에 젖은 조직 문화를 혁파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기술 경쟁력 확보에 매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는 그의 강조는 더 이상 과거의 성공에 안주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나타냈다. 국적과 성별을 불문하고 최고의 인재를 영입하고 필요하다면 수시 인사를 통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방침 역시 변화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사즉생'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조직 전체를 과도한 긴장과 불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해 정신력만 강조하고 장기적인 비전과 가치를 간과할 위험도 존재한다. 삼성전자가 진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속도전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근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거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했던 진정한 의미의 '사즉생'이 필요하다.
'사즉생' 경영 전략 이후 새로운 단계의 전략도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직원들의 동기 부여를 극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죽느냐 사느냐'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또 다른 메시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삼성의 문제로 지적돼 온 조직 문화가 과거의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수평적인 문화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문화로 바뀔 것인지 매우 중요하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술 혁신과 인재 육성에 투자하는 경영 철학과 메시지가 필요하다.
이번 이재용 회장의 '사즉생' 선언은 위기에 대한 강력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변화는 구호와 메시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삼성전자 전 임직원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때 비로소 '독한 삼성'으로 거듭나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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