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한미반도체 동맹가격 인상 대신 대규모 물량 계약

[딜사이트 이세연 기자] 올해 SK하이닉스의 TC본더 신규 수주 물량 대부분을 한미반도체가 확보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한미반도체가 SK하이닉스에 제품 가격을 28% 인상하겠다고 통보하면서, 가격 정상화를 위한 대가로 대규모 물량 배정이 뒤따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수주 결과는 양사 간 갈등의 향방을 가를 분수령으로, 한미반도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갈 경우 협력 관계가 복원될 가능성이 나온다. 당초 발표는 지난주로 예정돼 있었으나, 중요 사안인 만큼 SK하이닉스 측에서 내부 검토가 길어지면서 발표 시점이 이달 말로 연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해 TC본더 신규 발주 규모는 지난해(3000억원)보다 1000억원 줄어든 총 2000억원 규모로 전해진다. 올해는 작년 대비 실리콘관통전극(TSV) 생산라인 캐파 투자가 적어 발주 규모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서는 후발주자인 한화세미텍 장비가 한미반도체 만큼의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려워, 이번 물량의 대다수가 한미반도체에 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올해 SK하이닉스의 TC본더 신규 수주 물량은 한미반도체가 대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미반도체가 최근 TC본더 납품가를 인상한 만큼, 이를 다시 정상화하려면 수주 물량을 많이 배정해주는 방식으로 협상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한미반도체는 최근 SK하이닉스에 TC본더 납품 단가를 약 28% 인상하겠다고 통보한 바 있다.
또 SK하이닉스가 그동안 엔비디아에 납품한 HBM3E 8단과 12단 제품 모두 한미반도체의 TC본더로 제조된 만큼, 양산 경험이 부족한 한화세미텍에 물량을 상당수 배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실리와 자존심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앞선 관계자는 "SK하이닉스도 당초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돼 당황한 모습"이라며 "납품업체 이원화는 제조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전략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한화세미텍 장비를 많이 사용하면 한미반도체와 관계가 틀어지는 상황이 돼, 사실상 '이원화'가 아닌 또 다른 의미의 제약이 생긴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SK하이닉스의 이번 TC본더 신규 발주는 다소 극단적인 선택이 불가피한 구조라, 한미반도체가 대부분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SK하이닉스 벤더로 재진입을 노리던 ASMPT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ASMPT, 한미반도체, 한화세미텍에 수주 물량을 각각 3:3:3으로 배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하지만 ASMPT의 TC본더는 지난해 말 SK하이닉스 퀄테스트 단계에서 성능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ASMPT는 다이본더에 강점을 가진 만큼 정밀도는 높지만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 메모리 공정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며 "내년쯤에 다시 테스트를 시도해볼 수는 있겠다. 단기적으로는 벤더에 진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에 발주를 주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해왔다. 내부적으로는 한화세미텍의 TC본더 기술력이 자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 벤더 목록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으나 예상 외로 SK하이닉스와 한화세미텍 간 협력이 점차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한미반도체가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기술 유출 및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며 양사 간 긴장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최근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에 약 12대 규모, 총 420억원 상당의 TC본더 수주를 발주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한화세미텍 장비는 대당 35억원, 한미반도체 장비는 25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미반도체는 지난 8년간 가격을 동결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28% 인상을 단행하더라도 한화세미텍보다 저렴한 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미반도체도 마이크론으로부터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지만, 우선순위는 항상 SK하이닉스였다"며 "그런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리자 내부적으로 적잖은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TC본더 납품 단가 인상 계획을 통보, 전담 CS 엔지니어 인력을 철수시켰다. 사태가 심화되자 SK하이닉스 경영진이 한미반도체 본사를 직접 찾아, 엔지니어 복귀와 추가 장비 구매 등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양사 간 갈등은 일단락된 분위기지만, 향후 흐름은 당장 이달 중 발표될 SK하이닉스의 TC본더 신규 발주 결과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미반도체 역시 이를 의식해 예정돼 있던 IR 행사를 5월로 연기한 바 있다.
한편 SK하이닉스 역시 한미반도체에 대한 불만을 내비쳐온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경쟁사인 마이크론에 납품하는 TC본더 물량이 늘어난 점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미반도체는 지난해 4월부터 마이크론에 TC본더를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지난해만 30대가 넘는 장비를 SK하이닉스보다 약 30% 높은 가격에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는 이보다 많은 양의 추가 공급이 예정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사 간 협력이 공고해지는 모습은 한미반도체 사업보고서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 한미반도체 대만 법인의 매출은 전년 대비 120.35% 늘어난 104억원을 기록했으며, 당기순이익은 흑자 전환해 3억4500만원을 달성했다. 마이크론 대만 생산 팹으로의 TC본더 수주가 급증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한미반도체 대만법인 한 관계자는 "한미반도체는 해외법인을 '커미션제'로 운영하고 있다. 해외법인 직원들이 특정 기업과의 영업에 성공해 매출이 발생하면, 해당 매출에 대해 사전에 약속된 비율 만큼 커미션을 제공하는 구조"라며 "따라서 대만법인의 매출이 소액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마이크론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매출이 발생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번 수주 계약 건에 대해 "현재로서는 확정된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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