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K-금융의 글로벌 행보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외 진출은 이제 주요 금융사에 단순한 기회 모색이 아니라 핵심 사업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탄탄한 해외 실적은 '생산적 금융'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서 선순환적 수익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딜사이트는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각 거점에서 펼쳐지는 국내 금융사의 현지 사업과 전략,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 주]
[부다페스트(헝가리)=딜사이트 한진리 기자] “앞으로는 헝가리만 따로 보기보다 중동부유럽(CEE)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보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한국 기업의 생산과 공급망은 이미 국경을 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공장은 국경을 넘었지만 금융회사의 영업 전략은 여전히 국가별 거점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광윤 신한은행 헝가리 대표사무소장은 이제 한국계 은행들도 개별 국가가 아닌 중동부유럽 전체를 하나의 기업금융 시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생산시설뿐 아니라 국경을 넘나드는 협력사와 공급망 전체를 금융의 영업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딜사이트와 만난 이 소장은 “한국계 은행도 부다페스트와 바르샤바, 프라하를 각각 독립된 시장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중동부유럽 한국 기업금융 벨트(CEE Korean Corporate Banking Corridor)’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앞으로는 단순 대출 제공자가 아니라 여러 국가를 연결하는 크로스보더(Cross-border) 금융 플랫폼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이 제시한 전략의 핵심은 기업금융의 고객과 영업 범위를 동시에 넓히는 데 있다. 한국 대기업을 따라 개별 국가에 진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재·부품·장비 협력사와 물류·재활용 기업까지 고객 기반을 확대하고, 여러 국가에 분산된 생산거점과 자금 흐름을 하나의 금융 네트워크로 연결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대기업 따라갔던 금융…이젠 공급망 전체로
이 소장이 금융 전략의 전환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한국 제조기업의 유럽 진출 방식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대기업의 생산시설이 들어서면 관련 협력사들이 함께 진출하면서 금융 수요도 생산과 공급망 전반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단계에서는 대규모 시설투자자금이 필요하고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면 원재료 구매와 재고 확보를 위한 운전자금 수요가 발생한다. 여기에 협력업체들의 매출채권 금융과 팩토링, 외환거래, 급여·예금 관리 등이 더해지면서 기업금융의 범위가 넓어진다.
이 소장은 “삼성SDI나 SK온 같은 대기업이 들어오면 관련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이 함께 움직인다”며 “금융 수요 역시 대기업 시설투자(CAPEX)에서 협력사의 시설자금과 운전자금, 매출채권, 팩토링, 외환, 급여·예금까지 계속 확대된다”고 말했다.
2차전지 산업이 대표적이다. 헝가리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이 들어서면서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함께 진출했고 재활용 분야까지 연계된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기업 간 생산과 납품이 여러 국가에 걸쳐 이뤄질 경우 거래대금 결제와 환위험 관리, 매출채권 금융 등도 국가 간 금융 수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특정 대기업 한 곳에 금융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자금 수요를 충분히 포괄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완성품 제조기업부터 소재·부품·장비, 물류, 재활용 업체까지 밸류체인 전체를 하나의 금융시장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이 소장의 판단이다.
이 소장은 “중요한 것은 대기업 하나를 따라가는 금융이 아니라 밸류체인 전체를 따라가는 금융”이라며 “어떤 협력업체가 추가로 들어오고 자금 수요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를 함께 봐야 한다”고 말했다.
◆블록화하는 유럽…CEE 제조업 벨트 부상
한국 기업의 공급망이 중동부유럽 전역으로 확장되는 배경에는 유럽의 산업정책 변화도 자리하고 있다. 과거 생산 효율성을 중심으로 세계화가 진행됐다면 최근에는 경제안보와 공급망 안정성을 앞세워 주요 경제권별로 생산 기반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이 소장은 “예전엔 전 세계가 세계화를 얘기했다면 지금은 블록화로 가고 있다”며 “유럽에서 판매할 제품은 유럽 안에서 생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전략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공급망 안정성을 위해 역내 생산 기반 확보에 무게를 두고 있다. 탄소배출과 관련한 규제도 강화하면서 기업들이 생산거점과 공급망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소장은 “유럽 내 기업이 탄소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상황에서 규제를 덜 받는 해외에서 생산한 제품이 그대로 들어오면 가격 경쟁이 맞지 않는다”며 “역외 제품에도 비용을 부과하는 구조가 강화될수록 기업 입장에서는 유럽 안에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할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동부유럽은 서유럽 주요 소비시장과의 접근성, 제조업 기반, 상대적인 비용 경쟁력을 갖춘 생산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헝가리 역시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루마니아·세르비아 등 여러 국가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주요 제조업 거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국 기업들도 중동부유럽 곳곳에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슬로바키아에는 기아, 체코에는 현대자동차가 생산거점을 두고 있으며 헝가리에는 삼성SDI와 SK온, 폴란드에는 LG에너지솔루션 등 이차전지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완성차와 배터리, 소재·부품 기업의 생산기지가 여러 국가에 걸쳐 분포하면서 중동부유럽 제조업 공급망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소장은 “앞으로 새로운 제조업 투자가 유럽으로 들어온다면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같은 지역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고 전망했다.
◆국경 넘는 공급망…은행도 'CEE 금융 벨트'로
이 소장은 한국 기업의 생산거점이 여러 국가에 걸쳐 연결되는 만큼 한국계 은행의 유럽 영업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별 거점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을 하나의 기업금융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한국계 은행들은 유럽 각국에 법인과 지점, 대표사무소 등을 두고 현지기업과 한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생산시설과 협력업체가 여러 국가에 분산된 기업의 금융 수요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려면 국가별 영업망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헝가리의 배터리 소재기업이 폴란드 생산시설에 제품을 공급한다면 거래대금 결제와 환위험 관리, 매출채권 금융이 국가 간 금융 수요로 이어질 수 있다. 여러 국가에 사업장을 둔 기업은 각 법인의 자금 흐름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크로스보더 캐시매니지먼트 서비스도 필요할 수 있다.
국가마다 금융 규제와 통화·결제 환경이 다른 만큼 개별 거점의 금융서비스를 연결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이 소장이 제시한 '중동부유럽 한국 기업금융 벨트'는 이러한 금융 수요를 국가별로 나눠 보기보다 하나의 공급망 안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하자는 개념이다.
이 소장은 “유럽의 블록화가 CEE 제조업 허브화를 촉진하고 한국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면 금융 수요도 함께 확대된다”며 “한국계 은행도 이에 맞춰 CEE 네트워크를 넓히고 국가 간 금융을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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