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우찬 기자] 미국 전력망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새로운 투자 사이클에 진입하고 있다. AI를 비롯한 대규모 전력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발전설비와 송전망 확충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노후 전력망 교체와 발전소 폐쇄, 핵심 기자재 공급 부족까지 겹치면서 미국 전력산업의 병목 현상은 심화하는 모습이다.
미국 유틸리티와 한국 전력기업들은 이를 새로운 사업 기회로 보고 있다. 특히 한국전력이 강점을 지닌 765kV 초고압 송전망과 한국 기업들의 변압기·차단기·케이블 등 전력기기 경쟁력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시장에 안착하려면 단순한 제품 수출을 넘어 현지 생산과 엔지니어링, 설치·시운전 등 실행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지난 9월29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딜사이트와 메이어브라운 공동 주최로 열린 ‘한미 전력망 뉴욕포럼’ 1세션에서는 미국 전력망의 현주소와 한미 협력 가능성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마이클 현 PSEG 수석부사장 겸 최고상업책임자(CCO), 앤드루 우르다 LS일렉트릭 아메리카 마케팅 전략 부사장, 차승태 한국전력 전력계통연구소장, 김상준 대한전선 미국법인 부사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배준범 메이어브라운 파트너 변호사가 토론 좌장을 맡았다.
◆AI 바꾼 미국 전력망, 공급 확대 ‘관건’…한국전력 765kV 경쟁력
마이클 현 PSEG 수석부사장은 미국 전력산업이 직면한 핵심 과제를 ‘자원 적정성’과 ‘경제성’으로 요약했다. AI 성장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공급 확대는 더디다는 진단이다. 그는 “최근 수년 동안 화석연료 발전소가 폐쇄됐고 북동부 지역의 해상풍력 발전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원전 역시 미국에서 신규 건설 경험이 제한적이다”고 언급했다.
결국 발전소뿐만 아니라 송전·배전망까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전력망 투자 확대는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평가다. 실제 뉴저지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요금이 주요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현 수석부사장은 “전력회사가 성장하려면 투자가 필요하지만 그 비용은 결국 요금 납부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력망 투자의 가장 큰 과제가 기술이 아니라 비용 부담 주체에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 부사장은 한국이 송전과 원전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특히 765kV급 초고압 송전망 경험을 강조했다. 미국 유틸리티 가운데 765kV 송전 경험을 충분히 보유한 곳이 많지 않은 반면 한국전력은 국내 전력망 구축 과정에서 상당한 경험을 축적했다는 설명이다.
차승태 한국전력 전력계통연구소장은 한국과 미국의 전력망 상황이 다르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발전설비와 전력 수요지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송전망을 확대했다면 미국은 AI 데이터센터 등 신규 대규모 부하에 대응하는 동시에 노후 전력망을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전은 PSEG와 765kV 송전망 사업 협력을 하고 있다. 한전은 PSEG에 기술 컨설팅을 제공한다. 한전이 보유한 765kV급 초고압 송전망의 설계·조달·시공(EPC) 역량과 안정적인 계통 운영능력을 입증한 성과다. 장거리·대용량 송전 기술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차 소장은 “미국 현지 상황에 맞춘 송전망 개발과 신규 송전탑 설계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단기적으로는 송전선 교체(reconductoring)와 동적 전력조절 등 기존 전력망의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765kV와 초고압직류송전(HVDC)을 활용한 대용량 장거리 송전망 확충이 요구된다는 게 차 소장의 설명이다.
PSEG가 한국 기업들과 협력을 확대하게 된 계기로 코로나19 팬데믹이 낳은 공급망 위기를 꼽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변압기와 차단기 등 주요 전력기기 공급 부족이 심각했다. PSEG 역시 필요한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으로 눈을 돌렸고 대한전선 등 한국 기업과 거래를 시작했다.
현 부사장은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765kV 송전과 원전이라는 두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다시 검토하게 됐다. 특히 미국의 원전 건설 경험 부족과 한국의 시공 경험은 대비된다는 평가다. PSEG 역시 기존 원전 부지를 활용한 신규 원전 도입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 등과 협력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LS일렉트릭·대한전선 “현지화로 미국시장 승부”
한국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단순한 제품 공급업체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파트너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앤드루 우르다 LS일렉트릭 아메리카 부사장은 미국 사업 성장 배경으로 ‘품질’과 ‘납기’를 꼽았다. 미국 시장에서 데이터센터를 축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올해 미국 내 출하 규모가 13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LS일렉트릭은 팬데믹 당시 미국 내 재고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면서 공급망 위기에 대응했다. 이후 미국 기업들이 차단기와 주파수변환기 등을 찾으면서 공급망 파트너로 자리 잡았고 부품 공급에서 시스템·솔루션 공급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우르다 부사장은 “제품의 품질뿐만 아니라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차별화 요소다”고 강조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와 하이퍼스케일러 시장에서는 납기 준수가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한전선은 초고압·HVDC 케이블 시스템을 중심으로 현지 실행력을 강화하고 있다. 김상준 부사장은 미국 고객에게 케이블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링과 설치, 테스트, 시운전까지 프로젝트 전 과정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도 검토하고 있다. 김 부사장은 “현지화가 단순히 공장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지 엔지니어링과 제품관리, 현장 서비스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팀코리아' 전략, 미국 전력망 생애주기 공략
한전은 미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역량을 묶는 ‘팀코리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차 소장은 과거 UAE 원전 프로젝트처럼 한전을 축으로 국내 기업과 기관의 역량을 결집하는 방식이 미국 전력망 시장에서도 유효할 것으로 내다봤다.
핵심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한전이 미국 유틸리티와 초기 설계 단계부터 협력해 기술 사양과 장기 수요를 파악하고 국내 제조사들이 장납기 기자재를 조기에 준비하는 구조다.
대한전선과 LS일렉트릭 등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기반을 확대하고 있는 만큼 한국의 제조역량과 미국 현지 생산을 결합하면 조달 리드타임과 프로젝트 납기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궁극적으로는 조달·기획·엔지니어링·건설·운영뿐 아니라 프로젝트 파이낸싱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참여하는 것이 목표다.
패널들은 미국 시장의 특수성도 강조했다. 김 부사장은 “미국은 단일 시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각 유틸리티마다 기술 기준과 요구조건이 달라 제품의 기술적 자격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지 경험과 실행력이 실제 수주로 이어지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LS일렉트릭 역시 반도체와 전기차 분야에서 확보한 미국 현지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데이터센터 사업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가격이나 기술 사양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납기를 지키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 고객과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
특히 전력기기 공급 부족이 이어지면서 장비 생산 슬롯을 선점하는 것 자체가 프로젝트의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현 부사장은 “공급자와 구매자 사이의 협상력이 시장 상황에 따라 바뀌는 만큼 장기적인 신뢰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비용 부담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현 부사장은 발전과 송전망을 포함한 대규모 인프라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하이퍼스케일러와 대형 데이터센터가 새로운 전력수요를 만들어내는 만큼 이들이 추가 인프라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다.
지역사회가 AI 데이터센터 때문에 전기요금이 오르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일부 하이퍼스케일러는 지역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전력·용수 비용을 부담하거나 세금 지원 등에 나서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고 우르다 부사장은 소개했다. 결국 미국 전력망의 AI발 투자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자본뿐 아니라 지역사회와의 합의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번 포럼에서 확인된 것은 미국 전력망 시장의 경쟁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미국 전력수요가 급증하면서 발전과 송전, 변압기, 차단기, 케이블 등 전력 인프라 전반에서 투자 확대가 예상된다.
미국 유틸리티는 초기 설계부터 참여하고 장납기 기자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며 현지에서 생산·설치하고 시운전과 유지보수까지 책임질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AI 데이터센터가 촉발한 미국 전력망 투자는 미국에서 신뢰관계를 쌓은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현지 사업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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