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차화영 기자] 싱가포르 출장 중 만난 한 주재원에게 처음 왔던 때와 비교해 가장 크게 달라진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고민 끝에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여기는 진짜 변화가 없는 나라예요." 그가 싱가포르에 처음 발을 들인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걸 굳이 꼽자면 사무실 앞에 새로 들어선 고층 빌딩 하나뿐이라고 했다.
뜻밖이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금융허브'로 역동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마다 새로운 규제가 나오고 산업이 재편된다. 최근에 싱가포르 금융당국에 해당하는 싱가포르통화청(MAS)은 여신 심사에 환경 리스크 평가까지 새롭게 반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규정은 계속 바뀌어도 변화의 방향은 한결같다. 유동성과 자본 건전성 기준은 더 엄격하게, 외국계 회사의 자국민 고용과 급여 기준은 더 까다롭게. 세부 조항은 계속 손보되 큰 틀의 정책과 원칙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규정이 지향하는 큰 원칙 자체가 하루아침에 뒤집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싱가포르 금융시장의 큰 장점이라고 현지 주재원들은 입을 모았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정기적으로 감독당국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규정만 파고드는 스터디를 석 달간 진행했다고 했다. 규제가 촘촘하고 까다로운 건 맞지만 방향을 예측할 수 있어 오히려 시간을 들여 제대로 대응할 가치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한국 금융권을 취재하다 보면 정반대의 장면을 자주 만난다. 정권이 바뀌고 경제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금융정책의 무게중심도 움직인다. 가계대출 규제만 해도 정권마다 온도차가 크다. 박근혜 정부는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해 대출 문턱을 낮췄고 문재인 정부는 집값을 잡겠다며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등 규제를 강화했다.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란도 비슷하다. 어느 때에는 관료 출신이 금융지주 회장에 선임되는 ‘관치금융’이 문제가 됐다. 어느 때에는 민간 출신 회장의 장기 연임과 이사회 구성에 따른 이른바 '셀프연임'이 정부와 금융당국의 비판 대상이 됐다.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업무보고에서 '부패한 이너서클'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장기 연임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논란은 다시 불붙었다. 금융위는 지배구조 개선 방안 마련에 분주하고 금융지주들은 당국 눈높이에 맞춰 회장 선임 관련 내부 규정을 계속 손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금융정책의 널뛰기가 금융지주의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규제 방향이 정권마다 뒤집히면 금융회사는 중장기 전략을 짜기 어렵다. 오늘 승인받은 대출 기준이 다음 정권에서 규제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정상적인 지배구조로 평가받던 회장 선임 절차가 내일 관치 논란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금융지주를 평가할 때 정책 방향과 그에 따른 영향을 면밀히 따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 금융지주 IR 담당자는 회장 연임과 관련해 정부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해외 투자자들도 표정이 굳어지며 관련 질문을 쏟아낸다고 설명했다.
물론 싱가포르 방식이 정답은 아니다. 규제가 아무리 촘촘하고 까다로워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금융업에서만큼은 정책 방향의 일관성 자체가 경쟁력이 된다는 사실을 싱가포르에서 새삼 확인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쓰는 지배구조 개선안이 아니라 정권과 무관하게 지켜지는 원칙 하나가 지금 한국 금융권에 진짜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