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K-금융의 글로벌 행보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외 진출은 이제 주요 금융사에 단순한 기회 모색이 아니라 핵심 사업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탄탄한 해외 실적은 '생산적 금융'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서 선순환적 수익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딜사이트는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각 거점에서 펼쳐지는 국내 금융사의 현지 사업과 전략,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주]
[싱가포르=딜사이트 차화영 기자] “투명하면 할수록 경쟁은 치열해지잖아요.”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 국내 금융회사 관계자는 현지 금융시장의 특징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 금융회사와 자본, 인재가 모이는 아시아의 대표 금융허브. 싱가포르에서 시중은행과 국책은행 등 국내 금융회사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율’과 ‘규율’, 그리고 ‘경쟁’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했다.
싱가포르는 금융회사가 다양한 글로벌 금융거래를 펼칠 수 있도록 시장의 문을 넓게 열어두고 있다. 규제와 감독 기준이 비교적 명확해 사업의 예측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고 규제가 느슨한 시장은 아니다. 자본과 유동성, 자금세탁방지(AML), 내부통제 등 지켜야 할 기준은 엄격하다.
개방성과 투명성은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불러온다. 세계 각국의 금융회사가 한곳에 모이는 만큼 우량 기업과 프로젝트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거세다.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대형 금융회사와 국내 금융회사 사이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체급 차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국내 금융회사들이 싱가포르에서 보폭을 넓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싱가포르가 단순한 해외 영업점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현지법인과 아시아 주요 지점을 연결하고 달러 조달과 기업금융·자본시장 거래를 수행하는 ‘아시아 허브’로 활용될 수 있어서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글로벌 대형 금융회사와 정면으로 체급 경쟁을 벌이기보다 한국 기업에 대한 이해와 아시아 네트워크, 자본시장 역량, 정책금융 기능 등 각자가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600만 도시국가에 190여 금융기관…아시아 자금 모이는 허브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명 남짓의 작은 도시국가다. 그럼에도 싱가포르통화청(MAS) 금융기관 디렉터리에서 은행업(Banking) 부문으로 분류되는 금융기관은 190곳을 웃돈다. 여기에는 현지은행과 외국계 은행뿐 아니라 도매은행(Wholesale Bank), 머천트뱅크, 금융회사, 은행 대표사무소 등이 포함된다.
동남아시아 중심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과 발달한 물류·통신 인프라, 정치·사회적 안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넘어 역내 금융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특히 싱가포르는 달러를 비롯한 외화를 조달하고 운용하기 좋은 아시아의 주요 자금시장으로 꼽힌다. 외화채권 발행과 금융회사 간 거래가 활발한 데다 글로벌 은행들의 자본시장 조직이 집중돼 있어 대규모 자금을 필요로 하는 거래를 수행하기에 유리하다.
이 같은 특성은 국내 금융회사들이 동남아시아 현지법인과 싱가포르를 서로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에 이미 현지법인을 둔 국내 금융회사들은 현지법인을 통해 현지통화를 기반으로 고객을 발굴하고 영업하는 한편, 대규모 달러 자금이 필요한 기업이나 거래에는 싱가포르를 통해 자금을 공급하는 식으로 역할을 나누고 있다.
신한은행이 올해 1월 싱가포르지점에 글로벌자본시장(GCM) 데스크를 신설한 것도 이런 강점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GCM데스크를 통해 아세안 지역의 달러 자금 허브 역할을 강화하는 한편 채권 운용과 외환·파생상품 등 자본시장 영업도 확대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또 다른 강점은 ‘규제의 예측 가능성’이다. 현지에서 만난 국내 금융회사 관계자들은 금융당국이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금융회사에 어떤 수준의 관리를 요구하는지가 비교적 명확해 사업계획을 세우고 위험을 관리하기 수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 접근성이 좋다고 모든 금융회사가 동일한 방식으로 영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MAS는 라이선스에 따라 은행의 영업 범위를 구분하고 있다. 특히 은행업 부문에서 도매은행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싱가포르 금융시장이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금융보다 기업·기관금융과 역외 금융의 허브라는 성격을 보여준다.
영업하기 좋은 시장이라는 것이 규제가 약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금융회사가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대신 지켜야 할 기준은 엄격하다는 게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 때문에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은 신용과 리스크관리, 컴플라이언스, 리포팅 등을 다루는 4개 위원회를 운영하며 관련 사안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리스크관리위원회에서는 시장과 신용, 정보기술(IT), 운영 등 각종 위험요인을 살펴보고 컴플라이언스위원회에서는 고객확인(KYC)과 규제 변화 등을 논의한다.
자율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영역을 넓게 열어두되 정해진 규칙을 어겼을 때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구조다. 국내 금융회사 관계자들이 싱가포르 금융시장을 설명하면서 ‘자율’과 함께 ‘규율’을 반복해서 언급한 이유다.
◆모두에게 열린 시장…그만큼 경쟁도 치열
명확한 규칙과 높은 개방성은 싱가포르를 금융허브로 키운 원동력이지만 국내 금융회사에는 또 다른 장벽으로 작용한다. 누구나 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만큼 경쟁자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미국·유럽계 대형은행부터 일본계와 싱가포르 현지 은행까지 우량 기업과 프로젝트를 두고 경쟁한다. 좋은 조건의 거래일수록 참여하려는 금융회사들이 몰리는 만큼 시장이 투명하고 거래 기회가 많다고 해서 원하는 수준의 우량자산을 확보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정책금융기관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한국수출입은행도 싱가포르에서는 글로벌 금융회사들과 경쟁해 스스로 거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이미 오랜 기간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한 금융회사들이 좋은 거래를 선점하고 있는 만큼 그 사이에서 역할을 찾아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시장이 열려 있다고 해서 경쟁 조건까지 같은 것도 아니다. 국내 금융회사와 글로벌 대형 금융회사 사이에는 자본력과 네트워크 측면에서 상당한 격차가 있다.
글로벌 대형 금융회사들은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대규모 거래를 인수할 수 있는 데다 오랜 기간 쌓아온 기업 및 금융회사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한 건의 거래에서 소화할 수 있는 규모와 가격 경쟁력, 여러 국가의 고객과 거래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에서도 차이가 난다.
싱가포르에서는 경쟁자가 동시에 거래 파트너라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신디케이션 시장은 거래를 발굴하고 구조를 만든 금융회사가 함께 참여할 금융회사를 모집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만큼 평소 글로벌 은행들과 관계를 쌓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싱가포르에서 신디케이션 거래를 확보하려면 글로벌 금융회사들과 지속적으로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평소 설명회에 참석하고 글로벌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거래에 참여할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오늘 우량 거래를 놓고 경쟁한 금융회사가 내일 새로운 신디케이션 거래를 가져오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체급 대신 '연결'로…각자의 무기 찾는 K-금융
경쟁이 치열한데도 국내 금융회사들은 싱가포르에서 역할을 넓히고 있다. 싱가포르 시장에서 얻는 수익뿐 아니라 이곳을 발판으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주변 시장까지 사업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올해 싱가포르에 아시아지역본부를 두고 아시아IB센터 등 지역 단위 기능을 강화했다. 싱가포르와 홍콩, 도쿄, 시드니 지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현지법인 등을 연결해 아시아 사업의 협업을 확대하려는 전략이다.
싱가포르의 지리적 이점도 영업에 활용하고 있다. 양승용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 주변 국가를 직접 찾아 고객을 만난다. 그는 “매달 한 나라씩은 간다”며 주변 국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싱가포르의 장점으로 꼽았다.
신한은행은 전통적인 대출 중심의 자산구조를 다변화하는 데 힘을 싣고 있다. 과거 70% 수준이던 일반 대출자산 비중을 50% 수준까지 낮추고 채권과 외환 등 비대출자산을 확대했다. 2023년부터 자산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추진해온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은 앞으로도 IB와 채권, 금융기관(FI) 영업 자산 비중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수출입은행 싱가포르법인도 ‘현지 딜 소싱’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2022년 출범 초기에는 본점에서 발굴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비중이 컸지만 최근에는 현지에서 프로젝트를 직접 찾아 본점에 소개하거나 다른 금융회사들과 거래구조를 만드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각 회사가 선택한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싱가포르를 하나의 해외점포로 두는 데 그치지 않고 아시아 전역의 자금과 고객,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규칙이 명확한 대신 지켜야 할 기준이 엄격하고, 사업 기회가 많은 만큼 이를 차지하려는 경쟁도 치열하다. 모두에게 열린 시장이라는 강점이 역설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가 되는 셈이다.
글로벌 대형 금융회사와 체급으로 맞서기 어려운 국내 금융회사들이 찾은 해법은 ‘연결’이다. 한국 기업에 대한 이해와 동남아 현지법인 네트워크, 자본시장 역량, 정책금융 기능을 싱가포르라는 허브에서 연결하며 경쟁력을 확보해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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