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박관훈, 조은지 기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의가 '도입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시장을 열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국회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을 시작으로 전자금융거래법과 외국환거래법까지 손보는 입법 로드맵이 가시화하고, 산업계에서는 이미 확보한 무역·결제 기술을 실제 사업으로 옮길 수 있도록 규제의 문부터 열어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해법을 놓고는 시각이 갈렸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플랫폼에 종속되기 전에 여러 사업자가 참여하는 원화 기반 공동플랫폼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는 최소한의 규칙만 정하고 사용처와 수요는 민간 경쟁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제도화에 속도를 내되 어떤 방식으로 시장을 설계할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의 다음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딜사이트는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콘래드호텔 6층 스튜디오7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 시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주제로 ‘2026 블록체인 조찬 간담회’를 개최했다. 지난해 ‘K-콘텐츠와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제1회 간담회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가능성을 짚었다면 올해는 제도화와 실제 사업으로 넘어가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행사에는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강형구 한양대 교수, 사회를 맡은 김동현 중앙대 교수를 비롯해 블록체인·금융·법조계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했다. 황현일 세종 가상자산팀 변호사, 김근교 NC AI 글로벌사업실 실장, 김규태 갤럭시아머니트리 신규사업본부장, 신창선 오픈에셋 부사장, 서창훈 토스 상무, 최철 신한은행 AX혁신그룹 본부장, 김천석 코인원 COO, 홍진표 마브렉스 대표, 서병윤 DSRV 공동대표, 김종원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장, 박정재 율촌 전문위원, 함성진 아톤 경영전략본부장, 류춘 헥토월렛원 부대표, 이종석 컴투스홀딩스 BC사업본부장, 엄태성 하나은행 AI디지털혁신그룹장, 진명구 디지털엑스 대외정책본부장, 윤민섭 빗썸 리서치실장, 서상민 카이아 DLT재단 의장, 홍은표 블록체인법학회장 등이 함께했다.
◆ 10월 기본법 심사 시동…전금법·외국환법까지 '입법 로드맵'
이날 이승호 딜사이트미디어 이사회 의장은 개회사에서 “지난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면, 올해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논의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중요한 것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할 것인가를 넘어 어떤 원칙과 제도 아래 성장시킬 것인가”라며 “누가 발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준비자산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기존 지급결제·외환 시스템과는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를 풀어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정치권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을 시작으로 지급결제와 외환까지 단계적으로 제도를 연결하는 구체적인 입법 방향이 제시됐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인사말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여당 내 거버넌스 변화로 진도가 빨리 나갈 수 있게 됐다”며 “금융위가 정부안의 핵심 쟁점을 마지막으로 조율하고 있고, 10월 국정감사 이후 곧바로 법안 논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속도를 내야 하는 배경으로 글로벌 디지털금융 경쟁과 인공지능(AI) 에이전트의 확산을 꼽았다. 그는 “에이전트 AI가 24시간 사람을 대신해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 결제와 금융거래는 스테이블코인 기반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것이 스테이블코인을 빨리 제도화해야 하는 강력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이후 실제 지급·결제와 국경 간 거래까지 이어지도록 후속 법률도 손본다는 구상이다. 안 의원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이 통과되면 곧바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을 올릴 수 있도록 초안을 마련해뒀다”며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거래인 만큼 외국환거래법 정비도 함께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디지털자산기본법으로 발행과 준비자산 관리 등의 기본 틀을 만들고 전자금융거래법으로 지급·결제를 연결한 뒤 외국환거래법 정비를 통해 국경 간 거래까지 뒷받침하는 단계적 입법 방향이다.
◆ "달러 플랫폼에 종속될라"…원화 공동플랫폼 선점론
제도화와 함께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플랫폼 주도권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히 국내에서 받아들이는 데 그치면 향후 결제와 정산뿐 아니라 거래 데이터와 유통망까지 해외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다.
강형구 한양대 교수는 기조발표에서 “원화 단위·정산 규칙·거래 데이터·국경간 게이트웨이에 대한 국내 선택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술민족주의 시대에 기술주권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무역(Trade)·기업내부(Internal)·시장방어(Defense)·AI정산(Emerging)을 뜻하는 ‘TIDE’ 프레임을 제시했다. 특히 국내 결제와 가맹점, 자본시장의 원화 유동성과 고객 데이터를 지킬 공통플랫폼을 먼저 확보한 뒤 무역과 기업 내부 정산, AI 결제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추진 중인 스테이블코인 컨소시엄 오픈USD(OUSD)는 한국이 서둘러 플랫폼을 선점해야 할 이유로 제시했다. 강 교수는 “발행자에게 힘을 주면 발행자가 ‘초크포인트(병목지점)’가 될 수 있다”며 “오픈 스탠다드 방식으로 가서 발행자가 아닌 유통자에게 힘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행사의 ‘홀드업(갑질)’ 문제에 대해서는 “법이 아니라 계약으로, 유통 경쟁력을 가진 쪽에 경영권을 줘야 병목이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OUSD가 향후 달러를 넘어 다통화·다자산 플랫폼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경계했다. 강 교수는 “OUSD가 원화나 한국 국채를 담보로 원화 스테이블코인까지 내주는 식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따라가는 게 아니라 먼저 새치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술은 있는데 사업을 못 한다"…현장 막은 규제 칸막이
김동현 중앙대 교수의 진행으로 이어진 토론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단계를 넘어 기업이 실제 서비스를 시험할 수 있도록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특히 가상자산과 외환으로 나뉜 인허가 체계가 무역결제와 해외송금 등 스테이블코인의 핵심 활용처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 교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정산 인프라로 봐야 한다”며 “해외는 이미 실제 비용을 지급하는 단계로 가고 있는데, 국내는 아직 논의 단계라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류춘 헥토월렛원 부대표는 가상자산사업자(VASP)와 외국환업자 사이에 존재하는 제도적 간극을 대표적인 문제로 꼽았다. 가상자산사업자는 스테이블코인을 받을 수 있지만 달러 지급을 위해서는 별도의 외국환업 관련 자격이 필요하고, 외국환업자는 반대로 가상자산을 직접 취급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류 부대표는 “가상자산사업자(VASP)는 달러를 직접 지급지시할 수 없는 등 무역송금과 관련한 법적 간극이 크다”며 “코인에서 달러로 바뀐 자금의 입고 처리는 결국 은행이 맡는데, 신고 주체와 실제 처리 책임이 엇갈리는 모호한 구조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술 개발보다 제도 마련이 뒤처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서병윤 DSRV 공동대표는 “한국 무역 규모가 2000조원에 달해 이 생태계에서 유니콘이 몇십개는 나올 수 있다”면서도 “기술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무역결제·에이전트결제 모두 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종원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장은 금융과 외환, AI·블록체인을 함께 다룰 범부처 대응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AI 에이전트 시대의 속도를 현재 입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금융위에만 매달리지 말고 논의를 밖으로 끌어내는 실행 가능한 범부처 태스크포스(TF)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구체적인 사용처를 정해 스테이블코인을 실험하고 있다는 사례도 소개됐다. 서상민 카이아 DLT재단 의장은 일본에서 외국인 관광객의 소비세 환급금을 엔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QR결제 사업자와 은행 간 정산 문제를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으로 보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함성진 아톤 경영전략본부장은 국내 초기 사용처로 토큰화 금융자산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연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금융자산 토큰화는 속도의 문제이지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금융상품 토큰화와 연결해 초기 유동성을 확보하는 정책이 함께 마련돼야 국민들이 왜 써야 하는지가 명료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공동 인프라냐 민간 경쟁이냐…시장 설계 놓고 '갑론을박'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실제 사업을 허용하고 활용처를 넓혀야 한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시장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지를 놓고는 의견이 갈렸다. 특정 사업자의 독점을 막기 위해 공동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는 최소한의 규칙만 만들고 민간의 경쟁과 실험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홍은표 한국블록체인법학회장은 강 교수가 설명한 오픈스탠다드 모델에 공감하며 “인프라를 특정 기업이 독점하면 수익도 독점하게 된다”며 “후발주자인 우리나라는 스테이블코인에서도 오픈스탠다드 모델을 채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밝혔다.
이에 강 교수는 원화뿐 아니라 여러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국내 플랫폼에서 취급하는 '오픈KRW' 구상도 제시했다. 그는 “오픈KRW를 만들어 국내 거래소가 여러 나라 스테이블코인을 함께 취급하게 하면 한국이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윤민섭 빗썸 리서치실장은 정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처음부터 국가적 인프라로 규정하는 접근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개입과 통제가 강해질수록 민간 기업이 새로운 사업모델과 사용처를 발굴할 공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다.
윤 실장은 “국가가 인프라로 규정하고 지원한 산업이 실제로 더 크게 성장했는지는 의문”이라며 “네이버·카카오도 인프라로 규제했다면 지금만큼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역할을 어디까지 설정할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 설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남았다. 윤 실장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최소한의 룰만 정해야 한다”며 “수요는 시장에서 알아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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