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배지원 기자]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싼 법원의 판단과 산업 현장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커지고 있다. 법원은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 이행 여부와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있지만, 실제 기업이 부담하는 리스크는 형사책임을 넘어 공공조달과 계약, 거래처 신뢰 등 경영 전반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9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 7월 16일 협력업체 근로자 사망사고와 관련해 SK멀티유틸리티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 위반과 사고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반면 현장에서는 경영진에 대한 책임 범위가 확대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동일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더라도 사고 유형과 안전관리 체계 등에 따라 경영진이 부담하는 책임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기업들이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을 두고 혼란을 겪는 이유다.
◆형사책임 이전에 '경제적 제재' 현실화
기업 입장에서는 형사절차의 결과만이 리스크가 아니다. 중대재해 발생 이후 공공조달이나 계약 등 사업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조달청은 지난 7월 29일 행정규칙을 개정했다. 중대재해 발생 사실이 공표된 기업에 대해 2년간 정부 공공조달 종합쇼핑몰(MAS) 진입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형사절차가 마무리되기 전이라도 중대재해 발생과 공표를 계기로 기업의 사업상 리스크가 현실화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셈이다.
기업이 관리해야 할 리스크도 형사책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업 지속성은 물론 거래처 신뢰와 브랜드 가치 등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법률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자체도 '사업주' 책임에서 예외 아냐…안전관리 책임 물어야
중대재해 책임의 범위가 민간기업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최근 부산 강서구에서 자활근로 중 벌에 쏘여 사망한 사고를 계기로 지방자치단체의 안전관리 책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자체가 직접 수행하거나 위탁한 사업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도 안전관리 체계를 점검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위탁 사업의 경우에도 사업 전반의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안전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는 법원의 판단 기준과 현장에서 체감하는 책임의 범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상민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은 "판례는 '경영책임자가 의무를 이행했는가'를 묻고, 현장은 '관리를 제대로 했는가'를 체감한다"며 "이 간극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밝혔다.
협회가 제시하는 핵심은 형식적인 안전관리에서 실질적인 관리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선 안전 책임 거버넌스를 명확히 해야 한다. 안전과 관련해 누가 의사결정을 내리고 어떤 책임을 맡고 있는지를 문서화해 실제 경영책임자의 의무 이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위험성평가부터 개선조치, 이행 여부 점검까지 이어지는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 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위험요인을 사전에 확인하고 개선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다.
조달과 계약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도 선제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중대재해 발생 이후 형사책임이 확정되기 전에도 공공조달 등 사업 과정에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 역시 획일적인 대응보다 사업 특성에 맞는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직접 수행하는 사업뿐 아니라 위탁 사업을 포함해 전반적인 위험요인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게 협회의 설명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기업의 안전관리 방식도 사고 발생 이후의 법률 대응에서 사전 예방 중심으로 바뀔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정 회장은 "중대재해 시대의 경쟁력은 사고 이후의 법률 대응이 아니라 위험을 먼저 발견하는 예방 역량"이라며 "법과 현실의 간극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지자체가 예방 중심의 안전경영 체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맞춤형 가이드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둘러싼 법원의 판단은 경영책임자의 구체적인 의무 이행 여부와 사고와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반면 기업과 지자체가 실제로 부담하는 리스크는 공공조달과 계약 등 사업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결국 중대재해 대응의 초점도 사고 이후 책임을 따지는 데서 벗어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관리체계를 실제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 맞춰질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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