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주연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자산이 올해 상반기 큰 폭으로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과거 불황기처럼 팔리지 않은 제품이 쌓인 것이 아니라 메모리 수요에 대응해 생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재고가 함께 늘어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장기공급계약(LTA) 확대 등으로 고객사와 중장기 공급 물량이 미리 확정되면서 메모리 업체들이 향후 출하에 필요한 원재료와 생산 물량을 앞당겨 확보한 영향이 재고 증가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최근 메모리 반도체와 일부 원재료 가격까지 오르면서 재고자산 금액도 함께 커졌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최근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연결 기준 재고자산은 71조3891억원으로 지난해 말 52조6368억원보다 18조7523억원(36%) 증가했다.
반도체 사업에서도 비슷한 추이가 나타난다. DS부문 재고자산은 올해 상반기 말 38조567억원으로 지난해 말 28조8059억원보다 9조2508억원(32%) 늘었다. 이 중 공정 진행 중인 재고는 22조741억원에서 29조7101억원으로 약 35% 증가했다.
SK하이닉스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올해 상반기 말 재고자산은 17조9857억원으로 지난해 말 14조2894억원보다 3조6963억원(26%) 증가했다. 공정 진행 중인 재고를 뜻하는 재공품은 9조2074억원에서 11조788억원으로 20% 늘었고, 제품 재고도 2조4070억원에서 3조657억원으로 27% 증가했다.
특히 생산에 투입되는 원재료 증가 폭이 컸다. 원재료는 지난해 말 1조4893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말 2조4109억원으로 62% 늘었다. 저장품도 9026억원에서 1조1851억원으로 31% 증가했다. 재공품과 원재료 등 생산 과정과 직접 맞닿아 있는 재고자산의 장부가액이 전반적으로 커진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재고자산 증가에 생산량 확대와 단가 상승이 모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업황 개선에 대응해 웨이퍼 투입 등 생산 물량이 늘면서 재공품 규모가 커진 데다 최근 메모리 가격 상승에 따라 일부 재고의 단가도 함께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원재료도 같은 맥락이다.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공정 투입을 위해 미리 확보해야 하는 원재료가 많아지는 데다 일부 원재료 가격도 상승하고 있어 재고자산 금액이 함께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업황이 좋아지면서 생산 물량이 늘어난 영향도 있고, 일부 품목 가격 상승분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생산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전에 확보해야 하는 원재료 물량이 커진다. 여기에 일부 원재료 가격 상승 흐름도 있어, 물량과 가격 요인이 함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재고 규모가 커졌지만 재고 가치 하락에 따른 부담은 오히려 줄었다. SK하이닉스의 재고 평가손실충당금은 지난해 말 4949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말 4134억원으로 16% 감소했다. 삼성전자도 연결 기준 재고자산 평가충당금이 같은 기간 5조8418억원에서 5조2618억원으로 약 10% 줄었다. 재고가 늘면서 동시에 평가손실 부담까지 커졌던 불황기와는 정반대 흐름이다.
최근의 재고 증가는 과거 다운사이클 당시와는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과거에는 수요 둔화로 판매되지 못한 제품이 쌓이고 메모리 가격까지 하락하면서 재고 가치도 함께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현재는 확보한 수요에 맞춰 생산이 확대되는 가운데 메모리 가격과 일부 원재료 단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재고자산 금액이 함께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최근 메모리 가격이 크게 오른 만큼 가격 상승분이 재고자산 증가에 일부 반영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동시에 메모리 공급이 빠듯한 만큼 LTA를 통한 공급이 늘면서 재고 역시 판매되지 않아 쌓였다기보다 향후 공급할 물량을 미리 확보해 둔 성격이 크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 메모리 공급 부족과 LTA 확대가 자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로 주요 고객사들이 향후 필요한 메모리를 미리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메모리 업체들도 일정 부분 수요를 확보한 상태에서 생산 계획을 짜는 비중을 늘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시작된 공급 부족은 서버용 D램과 낸드 등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고객사들 사이에서 필요한 물량을 제때 확보하지 못할 위험이 커진 만큼 기존보다 이른 시점에 공급 물량을 확정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업체들도 향후 출하할 물량에 맞춰 원재료 확보와 웨이퍼 투입 등 생산 계획을 앞당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양사 역시 최근 반도체 수급 상황으로 인해 고객사로부터의 LTA 요청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D램과 낸드 모두 고객사들의 추가 공급 요청이 이어지고, 시장 가격 상승도 지속되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고객이 다년 공급 계약을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핵심 고객을 포함해 10여개 고객과 LTA 협상을 마무리했으며 추가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SK하이닉스는 “LTA는 단순 물량 공급을 넘어 중장기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고 고객의 기술 전략에 맞춰 차세대 메모리를 개발하려는 전략적 파트너십의 성격”이라고 했다.
이 같은 변화는 재고뿐 아니라 생산과 투자 계획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객사와 중장기 공급 물량을 미리 협의하면 향후 필요한 생산 규모를 가늠하기 쉬워지는 만큼 웨이퍼 투입과 원재료 확보, 설비투자 시점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수요를 예상해 먼저 생산한 뒤 판매처를 확보하는 것보다 일정 수준의 수요를 확보한 상태에서 생산과 투자를 결정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제품 사이클이 아니라 인프라 구축 작업의 성격을 가진다"며 "따라서 메모리 수요 역시 분기 단위 재고 사이클이 아니라 수년 단위 생산능력(CAPA) 계획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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