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향해 ‘부패한 이너서클’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관치금융을 막기 위해 자율성을 확대했지만 그 자리를 소수 내부 인사의 폐쇄적인 권력구조가 대신했다는 문제의식이다. 금융지주 회장의 권한과 CEO 승계구조를 둘러싼 논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돼왔다. 딜사이트는 금융지주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승계되는지, 이를 견제할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딜사이트 차화영 기자] 금융당국의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안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1월 ‘지배구조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며 3월까지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지난 6월에는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KB금융지주의 차기 회장 후보군 압축 전인 7월 초까지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금융당국이 좀처럼 답을 내놓지 못하는 배경에는 금융지주 지배구조가 안고 있는 오래된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직 최고경영자(CEO)의 권력 집중과 폐쇄적인 승계 구조를 막아야 하지만 정부와 금융당국이 인사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곧바로 ‘관치금융’ 논란에 직면할 수 있어서다. 관치를 막으면서도 내부 권력의 고착화를 차단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셈이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지주 지배구조가 다시 화두가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재명 대통령의 ‘부패한 이너서클’ 발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업무보고에서 “소위 관치금융의 문제로 정부에서 직접 관여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데 가만 놔두니 부패한 이너서클이 생겨 멋대로 소수가 돌아가며 계속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는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압축돼 있다. 정부가 인사에 개입하면 ‘관치’라는 비판을 받지만 금융회사에 자율성을 맡기면 현직 경영진과 이사회를 중심으로 폐쇄적인 권력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문제다. 현직 회장이 주요 보직 인사를 통해 차기 후보군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외이사로 구성된 회장후보추천위원회가 다시 차기 회장을 선택하는 방식이 반복되는 방식이다. 실제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란은 경영진 간 권력 다툼과 관치금융에서 장기 집권과 ‘셀프연임’, ‘참호 구축’까지 지난 15년간 논란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논쟁은 반복돼왔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앞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논란의 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경영권 분쟁과 외부의 낙하산 인사를 막기 위해 금융회사가 내부에서 후보를 육성하고 이사회가 차기 CEO를 결정하는 승계 시스템을 강화했지만, 이후에는 이 같은 내부 승계 체계가 현직 CEO의 장기 집권을 돕는 ‘참호’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금융지주 지배구조의 취약성을 수면 위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2010년 ‘신한사태’다. 당시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과 신상훈 신한금융 사장, 이백순 신한은행장 사이의 갈등이 경영권 분쟁으로 번지면서 최고경영진이 사실상 붕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금융지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던 신한금융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신한사태는 특정 지배주주가 없는 금융지주에서 권력 집중과 불투명한 경영승계 절차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최고경영진 간 갈등을 조정하고 안정적인 경영승계를 뒷받침할 지배구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신한금융은 이후 CEO 승계 시스템을 포함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섰고 금융당국도 2011년 금융지주들에 전문성을 갖춘 CEO 후보를 사전에 발굴·육성하는 경영승계 프로그램 마련을 주문했다.
내부에서 승계 시스템을 통해 CEO 후보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은 또 다른 배경은 금융권의 고질적인 관치금융 논란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관료 출신인 이른바 ‘모피아’나 정치권과 가까운 인사가 금융회사 수장으로 내려오는 낙하산 인사 논란이 반복되면서 금융회사 스스로 전문성을 갖춘 후보를 키우고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CEO를 선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2014년 KB금융 회장 선임 과정에서도 관치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윤종규 전 KB금융 부사장과 하영구 전 한국씨티은행장 등이 최종 후보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하 전 행장을 금융당국이 지원한다는 설이 제기됐다. 회추위는 결국 윤 전 부사장을 회장으로 선택했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외부의 입김보다 KB 내부 사정에 밝은 인사를 중심으로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관치 논란은 회장 선임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하 전 행장이 KB금융 회장 경쟁에서 탈락한 지 한 달여 만에 은행연합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금융노조 등을 중심으로 금융당국의 의중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금융당국 역시 금융회사가 스스로 CEO 후보군을 관리하고 수장을 선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했다. 금융위가 2014년 마련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에는 CEO 승계계획을 이사회의 상시 업무로 두는 내용 등이 담겼다. 외부의 인사 개입 가능성을 줄이는 대신 이사회가 중심이 돼 후보군을 관리하고 승계 절차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이다.
금융회사에 부여한 자율성이 확대되고 내부 승계 체계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번에는 정반대의 문제가 불거졌다. 현직 CEO의 연임이 이어지자 내부 승계 체계가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라는 본래 목적을 넘어 장기 재임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017년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첫 연임에 성공했고 2012년 취임한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도 이듬해 3연임을 앞두고 있었다. 최종구 당시 금융위원장은 현직 CEO가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경쟁자를 배제해 연임에 유리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며 이른바 ‘셀프연임’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관치금융을 막기 위해 금융회사에 보장한 자율성이 이번에는 현직 CEO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된 셈이다. CEO를 선임할 권한을 이사회에 맡겼지만 이사회가 현직 경영진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지 않다면 제도상 독립성과 실질적인 견제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 있다는 문제 제기도 뒤따랐다.
비슷한 논란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2023년 이복현 당시 금감원장은 CEO 선임 과정에서 경영진의 ‘참호 구축’이나 폐쇄적인 경영 문화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은행권 지배구조 공동 TF가 출범됐고 CEO 임기 만료 최소 3개월 전 승계절차 개시, 외부 후보군에도 충분한 검증 기간 부여 등 새로운 승계 원칙이 추가됐다.
같은 시기 외부 출신 CEO 선임을 둘러싸고는 다시 관치 논란이 불거졌다. 이복현 전 원장이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강도 높게 비판하던 시기 우리금융에서는 금융위원장을 지낸 임종룡 현 회장이 내부 후보들을 제치고 회장에 선임됐다. 금융권과 노조를 중심으로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금융지주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쟁이 지난 15년간 외부 권력과 내부 권력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반복해온 셈이다. 관치를 막기 위해 금융회사에 자율성을 확대하면 내부 권력의 고착화가 문제로 떠올랐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금융당국이 개입하면 다시 관치 논란이 불거졌다.
이 같은 논쟁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금융당국은 ‘참호 구축’을 막기 위해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횟수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왔지만 민간 금융회사 CEO의 임기를 법률로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느냐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장기 연임 자체보다 CEO를 견제해야 할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회장이 연임하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금융회사와 비교하면 임기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지 않느냐”라며 “중요한 것은 회장 선임 과정에서 이사회와 회추위가 현직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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