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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벼릴 때와 휘두를 때
딜사이트 안경주 성장기업부 부국장
2026-08-07 08:00:00
잘 만든 칼도 휘두를 때를 알아야 한다
이 기사는 2026-08-06 09:04:10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딜사이트 안경주 성장기업부 부국장] 최근 상장사 대표나 임원들을 만나면 예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실적이나 신규 사업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시가총액과 주가다. "관리종목만은 피해야 한다", "내년 시가총액 300억원 기준까지 적용되면 버티기 어렵다", "동전주 규제까지 겹치면 정상기업도 위험하다"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상장폐지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계기업을 시장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다만 지금처럼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규제까지 예정보다 빠르게 강화되는 데 우려를 나타낸다. 제도를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숨을 돌릴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이 목소리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국내 증시는 지금 두 개의 시장으로 갈라져 있다. 투자자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일부 대형주에 집중되고 있다. 반면 코스닥과 중소형주는 거래가 급감했다. 기업 실적이 개선돼도 주가는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기업가치보다 유동성이, 실적보다 수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시장에서 상장 유지 규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시가총액 200억원 미만 코스닥 상장사는 140곳을 넘어섰다. 관리종목 지정 우려 공시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적자를 벗어나 수년째 흑자를 이어가는 기업도 있고, 사업 구조를 바꾸며 실적을 개선한 기업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시장의 관심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장폐지 위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시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코스닥 거래대금은 불과 몇 달 만에 반 토막이 났고 투자자금은 일부 대형주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로 이동했다. 정상적인 가격 발견 기능이 약해지면서 기업의 경쟁력보다 시장의 유동성이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물론 상장폐지 제도는 필요하다. 그동안 국내 자본시장은 한계기업과 이른바 '좀비기업'을 지나치게 오래 시장에 남겨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사업 정상화 가능성이 낮은 기업이 상장사 지위를 이용해 자금조달만 반복하는 구조는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 투자자 보호와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해 일정 수준의 퇴출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다.


그래서 지금 와서 제도를 철회하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제도는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지난 6월 일정실업은 시가총액 미달을 이유로 국내 첫 상장폐지 사례가 됐다. 형식적 상장폐지 사유인 만큼 이의신청도 허용되지 않았다. 상장폐지 개혁은 선언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이 시점에서 제도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다. 이미 새로운 기준을 적용받아 시장을 떠난 기업과 주주들이 존재한다. 뒤늦게 기준을 완화한다면 형평성 논란은 물론 법적 분쟁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자본시장 정책에서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문제는 제도의 방향이 아니라 속도다. 금융당국은 상장 유지 시가총액 기준 강화 일정을 당초 계획보다 앞당겼다. 그 결과 코스닥 기업들은 짧은 기간 안에 15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높아진 기준을 적용받았고, 내년에는 다시 300억원 기준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대목이 있다. 현재도 시가총액 200억원을 밑도는 기업이 140곳을 넘는다. 내년 300억원 기준이 적용되면 대상 기업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현 시장 상황이 이어진다면 관리종목과 상장폐지 요건에 직면하는 기업은 예상보다 많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시장 상황이 양호했다면 기업들도 새로운 기준에 맞춰 체질을 개선할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시장은 특정 종목으로 자금이 쏠리고 코스닥은 유동성이 크게 위축됐다. 기업이 아무리 실적을 개선해도 시장의 평가를 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규제 일정까지 앞당긴 것은 예상보다 많은 기업을 관리종목과 상장폐지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동전주 규제도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달 12일부터는 주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들이 관리종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 당초에는 부실기업 중심으로 적용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최근의 시장 급락과 대형주 쏠림으로 대상 기업이 예상보다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시가총액 규제와 동전주 규제는 각각의 취지만 놓고 보면 모두 타당하다. 하나는 상장사의 최소 시장가치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다.


문제는 두 규제가 같은 시기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시가총액이 기준 아래로 떨어져 관리종목 우려가 커지고, 주가까지 밀리면 동전주 규제 대상이 된다. 관리종목 우려는 다시 주가를 압박하고, 주가 하락은 자금조달을 어렵게 만든다. 부실기업을 걸러내기 위한 제도가 정상기업의 회생 가능성까지 낮추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


현장에서 들은 우려도 결국 이 지점에 모인다. 기업들은 규제 철회를 요구하지 않는다. 시장이 제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적용 속도를 조절해 달라고 말한다.


귀를 기울일 만한 주장이다. 상장폐지 개혁의 방향은 맞다. 첫 상장폐지 사례가 나온 만큼 제도를 철회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시장 상황을 반영해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내년 시행 예정인 시가총액 300억원 기준은 시장 상황을 점검하면서 단계적으로 적용하거나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전주 규제 역시 예상보다 많은 정상기업이 영향을 받는다면 적용 시기와 회복 요건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는 규제를 후퇴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본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금융당국이 상장폐지 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시장의 신뢰는 규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상기업이 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도 함께 있어야 한다.


칼은 이미 뽑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칼을 거두는 일이 아니다. 시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지금, 그 칼을 얼마나 빠르게 휘두를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규제도 방향만큼 타이밍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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