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진철 편집국장] 얼마 전 전남 고흥에 있는 친구 부친상에 조문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한반도 최남단이라 할 수 있는 고흥까지의 거리는 400여㎞. KTX나 항공편이 닿지 않는 교통 오지인 탓에 자가용을 직접 운전해 가기로 했다.
제헌절 연휴까지 겹쳐 수도권을 빠져나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동탄신도시의 아파트 단지와 평택-시흥고속도로 인근 삼성 반도체 공사 현장의 타워크레인, 중부고속도로 청주 인근의 거대한 SK하이닉스 캠퍼스를 지나 충청권을 벗어나 호남고속도로에 진입해서야 비로소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완주에서 순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린 뒤 순천IC를 거쳐 고흥 나로우주센터로 향하는 왕복 6~8차선 도로에서는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뜨문뜨문 보이는 차들 사이로 속도를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곳곳의 과속 단속카메라가 이를 자제시킬 뿐이었다. 잘 뚫린 도로와 달리 통행 차량은 적막할 정도로 드물었고,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도 연휴가 무색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흔히 보이던 물류창고나 산업단지 안내 표지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도권의 꽉 막힌 100㎞를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과 이후 고흥까지 시원하게 뚫린 300여㎞를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이 거의 비슷했다.
400km의 이동이 대한민국 경제 지도를 보여준 것일까.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의 현실을 몸소 체감하면서 최근 정부가 호남권에 80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은 배경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고흥 빈소에서 만난 조문객 친구는 "20~30년 전만 해도 명절이면 고향에 내려오는 데 24시간 가까이 걸렸던 적도 있었다"며 "지금은 도로가 잘 닦여 그나마 빨라진 것이 위안"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호남권에 대한 대규모 투자 발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새만금, 국가산업단지에 이어 이번 반도체 클러스터까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프로젝트가 제시됐다. 발표 당시에는 지역경제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상당수는 예산 확보와 사업성, 민간 참여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번 호남권 800조원 투자도 같은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삼성과 SK 총수가 대통령과 함께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언제 첫 삽을 뜨고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800조원은 삼성과 SK 등 일부 대기업과 정부 재정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결국 정책금융과 연기금, 은행, 회사채 시장, 프로젝트파이낸싱(PF), 민간 자본이 대거 참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 자금을 끌어들일 만큼 충분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인공지능(AI), 에너지, 미래 모빌리티, 첨단소재, 데이터센터 등이 거론되지만,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계획서 속 장밋빛 청사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더 큰 과제는 속도다. 첨단산업은 5년만 늦어도 경쟁력을 잃는다. 인허가와 환경영향평가, 주민 협의, 정치 일정에 발목이 잡힌다면 투자 규모는 아무 의미가 없다. 세계는 이미 반도체와 AI 인프라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착공 시점을 논의하고 있다면 경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다. 지역균형발전도 중요하지만 민간기업의 참여 없는 균형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투자에는 반드시 현금흐름(Cash Flow)이 뒤따라야 한다. 산업단지가 분양되고 기업이 입주하며 고용과 세수가 창출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공장이 가동되고 투자금이 회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자본도 움직인다.
과거 지방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추진했던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새만금, 각종 국가산업단지 역시 수백조원의 경제효과를 내세웠지만 시간이 지나 남은 것은 미분양 부지와 낮은 입주율, 그리고 추가 재정지원 요구였다. 호남에 조성될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정치적 명분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 숙련 인력, 협력업체 생태계가 동시에 갖춰져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수도권 과밀과 지방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역균형발전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과제다. 하지만 성장률 둔화와 치열해지는 글로벌 제조업 경쟁을 감안하면 800조원이라는 투자 규모만으로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제는 숫자를 발표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떤 산업에, 어떤 방식으로 투자해 얼마만큼의 기업 경쟁력과 일자리, 수출을 창출할 것인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순천-완주 고속도로를 달리며 지금은 산과 들만 보이는 풍경을 바라봤다. 과연 5년 뒤, 아니 10년 뒤 그 길에서 '반도체 클러스터'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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