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신지하 기자] 정부가 29일 발표한 반도체 투자 계획을 두고 전문가들은 대체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호남에 메모리 팹을, 충청에 패키징을, 영남에 소부장을 배치하는 역할분담 구도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평가다. 다만 반도체 주요 생산시설이 들어설 호남과 달리 영남은 소부장만 언급돼 일각에서는 영남 민심을 의식한 구색 맞추기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날 정부는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반도체 시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3S+1F 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은 속도전(Speed), 거점전(Stronghold), 선도전(Spearhead) 3대 축을 중심으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총력지원체계(Full-support)로 이뤄졌다.
핵심은 서남권(호남)을 제2의 반도체 생산거점으로 키우는 것이다. 정부는 서남권에 총 800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팹 4기(삼성전자 2기, SK하이닉스 2기)를 구축하기로 했다. 충청권은 81조원을 들여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거점으로, 동남·대경권(영남)은 부산 전력반도체 공공팹과 구미 소부장 실증 인프라를 갖춘 '소부장 혁신 거점'으로 조성한다.
전문가들은 우선 이 같은 투자 구도 전반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산시설 확충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번 투자 결정은 당연히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기업들이 해외가 아닌 국내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는데, 이번 투자가 국내에 집중된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류상완 전남대 광주전남반도체공동연구소 교수(물리학과)는 호남·충청·영남으로 나눈 반도체 역할분담 구도 자체를 합리적으로 봤다. 그는 "반도체 관련해서는 팹뿐만 아니라 첨단 패키징, 소부장 등 여러 필요한 분야들이 각 지역별 장점, 특화 분야와 잘 연계돼서 제시된 것"이라며 "국가 전체의 역할분담 측면에서 호남에 반도체 팹을 만들겠다는 큰 그림을 제시한 부분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도 호남 우선 투자라는 방향 자체에는 "이런 결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부가 영남을 소부장 혁신 거점으로 규정한 데 대해서는 의문이 나왔다. 전공정과 후공정, 소부장이 한곳에 모여야 생태계로서 기능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특성상, 소부장만 따로 떼어 영남에 두는 방식이 적절한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또 반도체 주요 생산시설이 들어설 호남과 달리 영남은 소부장만 배정되면서, 호남 민심 반발을 의식해 영남 투자를 뒤늦게 끼워 넣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호남 투자가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결정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박 교수는 "클러스터라는 것은 소부장과 패키징, 전공정과 후공정이 쭉 연결돼서 생태계가 구성되는 것인데, 이를 떼어서 그냥 영남에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남권 홀대론이 나오니까 소부장을 갖다 붙인 것"이라며 "이렇게 급조해서 만들었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신규 팹을 한곳에만 몰아 짓는 방식 자체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클러스터를 분산시키고 있다. TSMC도 대만에 네 곳으로 나눠 짓고 있는데, 우리나라처럼 한곳에 몰아서 짓는 나라는 없다"며 "일본은 도쿄와 오사카 인근에 반도체 공장을 짓지 않고, 미국 마이크론도 세 곳에 떨어뜨려 짓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력과 용수 문제뿐 아니라 정전이나 자연재해 같은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정부가 용인 클러스터 완공을 7년·12년 단축하겠다고 발표한 데도 의문을 제기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날 SK하이닉스가 용인 클러스터 완공을 당초 2045년에서 12년 앞당긴 2033년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당초 목표 자체가 2050년 안팎인데 그 정도 앞당겨도 먼 미래 이야기"라며 "전력망 구축조차 지연되는 상황에서 단축이 현실적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체적인 계획 없이 향후 몇 년 안에 하겠다는 식의 발표는 의미가 없다"며 "용인도 짓고 호남도 짓겠다는 식이면 완전히 공수표에 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업계 한 전문가는 이번 결정의 배경에 정치적 요인이 있다고 봤다. 그는 "AI데이터센터 입지를 정할 때도 호남 지역에서 '대통령이 선거 공약에서 약속했으니 우리에게 줘야 한다'는 논리가 나왔는데, 당시엔 무산됐다"며 "이번 지방선거에서 해당 지역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적 논리라기보다 주변 상황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이번 정부 발표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오는 8월 반도체특별법 시행과 함께 반도체특구도 지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특구도 광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며 "그동안 특구 지정을 준비해온 다른 지자체들은 오늘 발표를 보고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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