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상경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룹은 지난해 컨틴전시(비상계획) 체제에 돌입한 이후 1년이 넘도록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한시적 조치이던 비상경영이 일상적인 경영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비용 절감이 조직 운영의 기본 원칙처럼 굳어지면서 비상경영이 '위기 대응'이 아닌 새로운 경영 원칙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룹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갈수록 녹록지 않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따른 관세 리스크와 지정학적 갈등, 경기 둔화, 노조 파업 가능성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그룹은 상시적인 위기 대응 체제를 유지 중이다. 당장의 수익성을 방어하면서,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투자를 지속해야 하는 만큼 긴축 기조를 쉽게 거둘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정의선 회장은 최근 임원 전략회의에서 "그룹이 대학생들이 다니고 싶은 대기업으로 뽑혀야 할 이유가 있냐"고 언급하며 내부의 안일한 분위기를 질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안팎에서는 조직 전반에 위기 의식을 재차 환기하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 미국 관세 대응 위한 ‘컨틴전시 플랜’…올해는 더 강력한 비용 통제
그룹의 비상경영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현대차는 지난해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단순 원가절감이 아닌 투자 우선순위와 효율성에 입각한 생산능력과 운영비용을 최적화하는 컨틴전시 플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가능성과 보호무역 강화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현대차·기아 재경본부는 주요 사업부에 예산 절감 지침을 전달하고 사업부별 비용 감축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신규 투자 역시 우선순위를 재점검하는 방식으로 조정됐다.
하지만 그룹은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상경영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예컨대 현대차는 올해 들어 모든 사업계획과 예산 편성, 비용 집행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는 '제로베이스 버짓(Zero-Based Budget)' 체계를 도입하며 비용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기존 예산을 일부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사업의 필요성과 지출 타당성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따져보겠다는 의미로 풀이되고 있다.
그룹 안팎에서는 비용 통제가 특정 사업이 아니라 조직 운영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위기 대응을 위해 시작한 컨틴전시 플랜이 경영 전반을 관통하는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 협력사 덩달아 비용절감 동참…노조 리스크에 긴장감 고조
주목할 부분은 그룹의 긴축 기조가 협력사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완성차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사는 그룹의 원가 절감 정책에 발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는 올해 상반기부터 주요 협력사를 대상으로 납품 단가 인하를 위해 최대 20% 수준의 원가 절감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현대차는 중국 부품사로부터의 조달 비중도 확대하고 있다. 비용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협력사들의 대응 여력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중견·중소 협력사가 단기간에 선택할 수 있는 원가 절감 방안이 인력 감축과 저가 원재료 사용처럼 제약이 크다 보니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다. 비상경영의 무게가 완성차를 넘어 공급망 전반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에 노조 리스크도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임금협상 결렬 이후 쟁의 절차를 밟고 있으며, 파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계열사와 협력업체까지 동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룹 내부의 긴장감도 높아지는 분위기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경영 여건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협력사와 고통을 분담하려는 취지겠지만, 성과급 30%를 요구하는 내부 노조 리스크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한쪽 생태계의 희생만 강요하는 비상경영은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며 "투자와 긴축, 상생 사이의 균형을 위해 그룹이 고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 대규모 미래 기술 투자 지속…자원 옥죄며 성과 압박
문제는 그룹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 속에서도 미래 투자를 멈출 수 없다. 실제로 그룹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를 비롯해 인공지능(AI), 수소, 로보틱스 등 미래 모빌리티 시장 선점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전개 중이다.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경쟁 구도가 빠르게 바뀌는 만큼 기술 선점에서 뒤쳐질 경우 경쟁력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결과적으로 그룹은 비용은 줄이면서도 미래 투자는 이어가야 하는 상반된 과제를 안고 있다. 긴축은 강화되지만 투자 역시 지속하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사업부마다 제한된 자원 안에서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 역시 커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룹의 이 같은 비상경영이 장기화될 경우 위기 대응을 넘어 기업의 경영 방식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비용 효율화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경영이 굳어지면 투자와 고용, 조직 운영 전반이 보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그룹의 비상경영이 단기간에 종료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글로벌 불확실성과 전동화 경쟁, 노사 갈등 등 경영 환경이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영 여건이 악화될 때 한시적인 비상경영은 불가피하지만, 긴축 기조가 장기화되면 기업의 투자 결정은 보수적으로 변하고 고용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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