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승주 기자] 애경그룹이 모태사업인 애경산업 매각을 추진한다. 지주회사인 AK홀딩스의 재무적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맡아왔던 생활용품·화장품사업을 매물로 내놓은 것이다. 특히 이번 결정은 그룹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 '선택과 집중'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던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용단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관측된다.
애경그룹은 애경산업의 매각을 위해 국내외 대형 사모펀드(PEF)과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 대상은 AK홀딩스(45.08%)와 애경자산관리(18.05%),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애경산업 지분 63.38%다. 애경산업은 그룹의 모태사업으로 지난해 매출 6719억원, 영업이익 468억원의 실적을 남겼다.
애경산업은 탄탄한 시장지배력과 안정적인 현금창출력을 갖추고 있어 매력적인 매물로 평가받는다. 실제 이 회사는 케라시스·2080·루나 등 생활용품·화장품부문 메가 브랜드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애경산업이 생산하는 샴푸와 치약 등은 충성고객들로부터 재구매율이 높고 화장품은 K뷰티 트렌드에 편승해 수익성을 개선하고 있다.
가격적인 메리트도 충분하다. 애경산업의 지난해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은 630억원에 달하는 반면 이달 1일 종가기준 애경산업의 시가총액은 3829억원(주당 1만4500원)에 불과해 주가수익비율(PER)이 8~9배에 그친다. 현재 시장에서는 애경산업의 몸값을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합쳐 최대 6000~7000억원 수준으로 관측하고 있다.

애경그룹이 캐시카우 역할을 맡아온 애경산업을 매각하려는 이유는 그룹 전반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재계 서열 62위인 애경그룹은 ▲생활용품 및 화장품(애경산업) ▲항공(제주항공) ▲화학(애경케미칼) ▲유통(AK플라자) 등 4개 축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애경케미칼은 중국발(發) 공급과잉, 제주항공은 환율상승에 직격탄을 맞으며 현금흐름이 둔화된 상태이며 AK플라자 역시 2020년부터 이어진 적자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주사인 AK홀딩스에 재무적 부담이 가중돼 왔다. 실제 이 회사의 연결기준 부채총계는 2020년 2조8894억원에서 2024년 4조918억원으로 늘어나며 부채비율도 228.8%에서 328.7%로 대폭 상승했다. 특히 지난해 말 기준 순차입부채가 2조1390억원에 달하면서 순부채비율이 171.8%(2020년 대비 52.7%↑)까지 상승했고 유동비율은 50.4%(23.2%↓)로 하락했다. 나아가 영업활동현금흐름은 1957억원으로 전년 대비 62.9% 급감한 반면 이자비용은 1258억원에 달했다.
무엇보다 AK홀딩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열사 주식을 담보로 차입금을 조달한 것이 발목을 잡고 있다. 이 회사는 제주항공에 2020년부터 총 2669억원의 현금을 출자했고 2023년 AK플라자에는 791억원을 지원했다. 당시 AK홀딩스는 제주항공과 애경산업, 애경케미칼 등 계열사 주식을 담보로 차입을 일으켰는데 지난해 12월 무안공항 사고 이후 계열사 주가가 동반 하락하며 그룹 전반의 유동성 위기도 가속화됐다.
이 가운데 애경그룹이 애경산업 매각이라는 초강수를 둘 수 있었던 건 결국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결과라는 시장 관측이다. 장 회장 입장에서도 '선택과 집중'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용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1970년부터 그룹을 이끌며 현재의 애경그룹을 일궈낸 데는 애경산업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현 시점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성장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시장 관계자는 "애경그룹이 다른 주력사업을 살리기 위해 애경산업 매각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라며 "사실 그룹의 모태사업을 매각한다는 것은 장영신 회장의 결단이 없다면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평가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도 "애경그룹 입장에서는 수십년 동안 일궈낸 산업을 내놓은 것인데 속앓이가 심할 것"며 "포트폴리오 관점에서 보면 애경산업이 그룹의 캐시카우인데 이를 유동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애경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애경산업의 매각은 아직 확정된 사항이 없다"면서도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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