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러다임 시프트'HBM3 퀄 통과' 삼성, HBM4서 역전 노려

[딜사이트 김민기 기자] 삼성전자가 반도체 패러다임 전환(시프트) 시기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AI(인공지능) 시대에 주목받고 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주춤하고 있다. 최근 4세대 HBM인 HBM3에서 엔비디아의 퀄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아직까지는 중국 수출용 제품에만 사용될 예정이라 본격적인 영향력 확대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평가다.
이에 선두주자인 SK하이닉스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HBM3E 12단 제품 퀄테스트를 빠르게 통과해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역량이 중요해지는 HBM4에서 판도를 뒤집어 과거 시장 패러다임 전환 시기에 경쟁사를 뛰어넘은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HBM3가 엔비디아의 퀄테스트를 통과해 8월부터 제품을 납품할 예정이다. 샘플 등 일부 물량은 2분기 말부터 납품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만 아직 삼성전자의 HBM3은 중국 시장을 겨냥해 개발된 엔비디아의 저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인 H20에만 사용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엔비디아와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손을 맞춰본 만큼 제품 안정성 여부 등에 따라 H100 등 추가적인 타 제품 적용이 판가름 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의 HBM3가 뒤늦게 엔비디아의 인증을 따낸 것은 기존 주력 공급사인 SK하이닉스의 HBM 생산능력이 HBM3E로 집중되면서 HBM3 물량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HBM3E 8단 제품을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HBM3 제품은 7월까지만 납품하고 물량을 줄이기로 하면서 8월부터 삼성전자가 빈자리를 메우는 구조다. 초기에는 조건부 납품으로 진행되며 성능과 안정성 여부에 따라 추가적인 물량 확대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부터 약 10개월간 엔비디아의 HBM3 퀄테스트를 진행했지만 성능 이슈 등으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동안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제품을 생산해왔지만 삼성전자와는 협력 과정이 짧아 양사가 서로 사양을 맞춰 가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분석이다. 양사가 사용하는 제조 방식이 삼성은 TC(열압착)-NFC 방식, SK하이닉스는 MR-MUF(몰디드언더필)이라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엔비디아-SK하이닉스-TSMC로 이어지는 HBM 생태계가 공고한 상태에서 삼성전자가 끼어들긴 쉽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2세대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를 누르며 선점했지만 2019년 갑작스레 수익성을 이유로 HBM 전담 연구개발팀을 축소했다. 개발 비용이 높고 생산 공장이 복잡해 ROE(자기자본이익률)가 안나오고 사용처도 적어 비주류 메모리에 속하다보니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더 이상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2022년 엔비디아가 H100에 탑재할 HBM3를 삼성전자 측에 의뢰했지만 삼성전자는 HBM 연구개발팀을 축소한 이후라 주문을 받지 못하면서 HBM 시장 주도권이 SK하이닉스로 넘어갔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시장 1위의 구조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새로운 시장 개척과 신기술 투자에 소홀했던 점이 패착이었다는 평가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초격차'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사 대비 빠르게 미세화 공정 개발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제조원가를 절감하면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꾸준히 이어갔지만 오히려 성공에 덫에 빠지면서 HBM 대응에 늦었다는 분석이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D램 매출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2.6%에서 지난해 8.4%로 올랐고, 올해는 20.1%로 급격히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시장의 주류인 HBM3(4세대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9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성전자에도 기회는 남아있다. HBM3E 8단은 SK하이닉스가 먼저 납품을 하고 있지만, HBM3E 12단의 경우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보다 먼저 개발하면서 양사가 모두 12단 제품에서는 퀄테스트 통과를 진행하고 있어서다.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와 비슷한 시기에 HBM3E 12단 퀄테스트를 통과한다면 내년 출시 예정인 '블랙웰 울트라'에 HBM3E 12단 제품을 동시에 탑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누가 먼저 HBM3E 12단 제품을 공급할 지에 따라 SK하이닉스가 HBM 선두 자리를 지킬 지, 삼성전자가 국면 전환을 할 지가 결정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본격적인 역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가는 6세대 HBM인 HBM4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HBM3E까지는 메모리반도체 기업이 베이직 다이(로직 다이)를 제조했지만, HBM4부터는 각각의 고객사가 요구하는 기능을 '맞춤형'으로 넣어야 하기 때문에 파운드리 공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SK하이닉스는 HBM4 시장을 잡기 위해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와 손을 잡았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HBM 제작·칩 설계를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종합 반도체 기업'인 만큼 효율성 측면이나 원가 경쟁력에서 SK하이닉스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 4㎚(나노미터) 공정을 적용하면서 승부수를 던질 것으로 보고 있다. TSMC가 12나노와 5나노 공정을 병행하기로 하면서 기존 7나노 공정이 아닌 4나노 공정으로 시장 판을 뒤엎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DS부문은 HBM 개발팀 신설, 어드밴스드패키징(AVP) 개발팀·설비기술연구소 재편 등을 내용으로 한 조직개편도 진행했다.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 체제로 바뀐 뒤 HBM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속도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더 이상 밀리면 반도체 사업의 미래가 없고 아무리 삼성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활을 걸고 HBM 시장에 대응하고 있다"며 "앞으로 패러다임 전환 시기에 경영자의 전략적 민첩성과 변화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전략적 의사결정을 제대로 내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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