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황지현 기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여러 차례 연기 끝에 자산운용사 11곳이 신청한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거래를 승인했다. 그레이스케일과 진행된 소송 패소가 이번 승인의 결정적인 계기로 보인다. SEC의 승인으로 기관투자자들의 투자 접근성이 좋아진 만큼 대규모의 자금 유입이 예상된다.
10일(현지시간)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SEC 홈페이지에 '비트코인 현물 거래소 거래 상품 승인에 관한 성명서'를 통해 "오늘 위원회는 다수의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상품(ETP)의 상장 및 거래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ETP(Exchange Traded Product)는 상장지수펀드(ETF)와 상장지수증권(ETN)을 합쳐서 부르는 용어다.
해당 ETF를 신청한 자산운용사 11곳 모두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승인된 자산운용사는 아크·21셰어즈, 블랙록, 그레이스케일, 비트와이즈, 반에크, 위즈덤트리, 인베스코, 피델리티, 발키리, 해시덱스, 프랭클린 등이다. 이에 따라 비트코인 현물 ETF는 11일(현지시간)부터 거래소에 상장돼 거래된다.
◆ SEC "그레이스케일 소송 패소, 상황 변화…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SEC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한 결정적인 이유로는 그레이스케일 소송 패소다. 가상자산 자산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 지난 2021년 자사가 운용하는 비트코인 신탁 상품인 'GBTC'를 ETF로 전환한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SEC에 제출했지만, SEC는 2022년 6월 반려했다. 이에 그레이스케일은 해당 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8월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그레이스케일의 손을 들어 SEC가 패소했다.
겐슬러 위원장은 공식 성명에 "SEC는 2018년부터 2023년 3월까지 20개 이상의 비트코인 현물 ETP 신청 건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레이스케일 GBTC의 현물 ETP 전환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며 "법원은 SEC의 반려 사유가 명확하지 않고, 이에 대한 소명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 루트는 비트코인 현물 ETP 상장 및 거래에 대한 승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비트코인 현물 ETP 관련 투자자 보호 조치가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비트코인 현물 ETP 발행사는 상품에 대해 공정하고 진실된 공시를 제공해야 한다. 비트코인 현물 ETP 거래를 지원하는 미국 내 증권 거래소는 사기·시세 조작 방지에 관한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면서 SEC 직원들은 10종의 비트코인 현물 ETP에 대한 'S-1(증권신고서)'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겐슬러 위원장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했지만 가상자산에 대한 강경한 기조는 유지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그는 "중요한 것은 오늘 위원회의 조치가 비증권 상품인 비트코인을 보유한 ETP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라며 "이는 위원회가 가상자산 자산 증권에 대한 상장 기준을 승인할 의향이 있다는 신호가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 비트코인 현물 ETP 상장·거래를 승인했지만 비트코인을 승인하거나 보증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포함한 가상자산의 가치가 연계된 상품과 관련한 위험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SEC 위원 헤스터 피어스도 성명을 통해 "첫 BTC 현물 ETP 신청서가 SEC에 제출된 지 10여년 만에 드디어 승인이 떨어졌다"며 "ETP는 중요한 혁신 분야인데도 불구하고 그간 SEC는 BTC 현물 ETF 승인을 미루기 위해 많은 리소스(자원)를 낭비했고, 행정 절차를 남용했다. 지금은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축하의 시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기관 투자자 접근성 향상, 최대 3000억달러 유입 예상
가상자산과 연동된 ETF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었다. 비트코인 선물을 기반한 ETF는 지난 2021년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증시에 상장됐다. 대표적인 선물 ETF는 BITO(ProShares Bitcoin Strategy)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BITO를 포함한 비트코인 선물 ETF는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비트코인 선물을 추종한다. 비트코인 외에도 이더리움도 선물 ETF도 거래되고 있다.
시장이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에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기초자산인 비트코인을 실제로 구입해 보유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자산운용사나 중개사가 직접 현물을 매매해 갖고 있어야만 운영할 수 있다. 이에 실질적인 자금이 비트코인을 넘어 가상자산 시장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더군다나 이번 승인을 통해 기관 투자자들의 접근성도 좋아져 대규모 투자자 자금이 신규 유입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각종 규제 등으로 기관에서 가상자산을 매입할 수 없었지만, 직접 비트코인을 사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해외 전통 금융사들은 대규모의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영국 스탠다드차타드(SC)는 승인 후 3개월 동안 10억달러(약 1조3193억원)의 자금 유입이 예상되며, 연말까지 1000억달러(약 131조원) 이상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노트에 따르면 현지 시장 분석가들은 비트코인 현물 ETF 첫 거래일에 40억 달러(약 5조2770억원) 상당의 자금이 유입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내에서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홍성욱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매우 낙관적인 시나리오로 전 세계 ETF 자금이 중장기적으로 1~3%가 유입된다고 가정하면, 약 1000억~3000억달러(396조원) 규모"라고 진단했다.
다만 시장에 대한 영향을 측정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의견도 있다. 스위스 소재 가상자산 파생상품 발행업체 21쉐어스의 공동설립자 오펠리아 스나이더는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에 따른 상장은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있으니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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