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송한석 기자]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해.”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을 달렸지만 주변 풍경은 그대로다. 의아해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이곳에서는 같은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계속 달려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다. 훗날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붉은 여왕 효과’의 모티프가 된 장면이다.
이달초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를 둘러보며 이 장면이 떠올랐다. 100년 넘게 가전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IFA지만 이제 TV, 냉장고, 세탁기만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인공지능(AI)의 무대가 화면 속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가면서 현재 글로벌 기술 전시회의 관심도 로봇과 피지컬 AI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타트업과 미래 기술을 모은 ‘IFA 넥스트(Next)’에 들어서자 변화는 더욱 뚜렷했다. 판다를 닮은 로봇부터 춤추는 휴머노이드까지 곳곳에서 로봇을 만날 수 있었다. 우연한 풍경도 아니었다. IFA는 올해 IFA Next를 역대 최대 규모의 휴머노이드 로봇 전시로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약 300개 업체가 참가한 공간에서 로보틱스를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이는 불과 8개월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전시회의 화제 중 하나는 현대차그룹과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처음 공개한 차세대 휴머노이드 ‘아틀라스’였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무대에 등장한 아틀라스는 현대차그룹의 AI 로보틱스 전략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고 ‘Best of CES 2026’ 로봇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틀라스가 남긴 강렬한 장면의 여운 때문이었을까. IFA에서도 휴머노이드는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 확실한 볼거리였다. 다만 로봇이 보여준 모습은 아직 실제 쓰임새보다 관람객의 흥미를 끄는 데 가까웠다. 예컨대 샤오미가 전시한 휴머노이드 역시 산업 현장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내세웠지만 정작 현장에서 눈길을 끈 것은 관람객과 하트를 만들거나 가위바위보를 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 IFA는 휴머노이드가 춤과 백플립 등을 선보이는 ‘로봇 온 더 런웨이(Robots on the Runway)’를 마련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로봇끼리 축구 경기도 펼쳤다.
물론 가전 전시회라는 IFA의 정체성과 맞닿은 로봇도 있었다. 유닉스(UniX) AI는 침대와 세탁기 등을 갖춘 생활공간에 휴머노이드를 배치해 가정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보여줬다. LG전자 역시 집안일을 돕는 홈로봇 ‘LG 클로이드’를 전시장 전면에 세웠다. 다만 올해 초 CES에서 처음 공개된 클로이드를 다시 만났을 때 눈에 띄는 변화를 체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관람객은 로봇 앞에 몰렸다. 기술의 완성도와 전시장에서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TV 화질이 더 좋아지고 냉장고가 사용자의 생활패턴을 더 잘 이해하는 변화는 이제 익숙하다. 반면 휴머노이드가 손으로 하트를 만드는 단순한 동작에도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었다. 당장 춤추고 공을 차던 로봇들이 우리의 집안일을 대신해 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섰다는 사실이다.
100년 넘은 가전 전시회도 관람객이 다음에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외면할 수는 없다. 같은 자리에 있기 위해서라도 계속 달려야 한다는 붉은 여왕의 말처럼 IFA가 ‘가전쇼’로 살아남기 위해 가전 밖으로 달리는 역설적인 풍경을 올해 베를린에서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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