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K-금융의 글로벌 행보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외 진출은 이제 주요 금융사에 단순한 기회 모색이 아니라 핵심 사업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탄탄한 해외 실적은 '생산적 금융'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서 선순환적 수익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딜사이트는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각 거점에서 펼쳐지는 국내 금융사의 현지 사업과 전략,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 주]
[자카르타(인도네시아)=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단순한 적자 탈출이나 회계상 흑자 전환은 거쳐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연간 6000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KB금융그룹의 확고한 캐시카우(현금창출원) 역할을 하는 현지 ‘1티어’ 은행으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한정호 KB뱅크 인도네시아(KBI) 최고전략책임자(CSO)가 그리는 최종 목적지는 단순한 정상화가 아니다. 부코핀은행 인수 이후 대규모 부실과 비용구조를 걷어내는 작업이 일단락된 만큼 이제는 KBI를 KB금융의 해외 핵심 수익원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향후 5년 내 현지 20위권으로 도약하고 장기적으로는 연간 순이익 6000억원을 내는 ‘1티어’ 은행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한 승부수는 ‘한국계 프리미엄’이다. 현지 대형은행과 점포 수나 가격으로 정면승부하기보다 KB금융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구조화금융 역량으로 우량 기업금융을 공략하고, 여기서 확보한 기업 고객을 디지털 리테일로 연결한다는 전략이다.
한 CSO는 KB금융그룹에서 재무·전략과 인수합병(M&A) 관련 업무를 두루 경험한 전략통이다. 지주에서 M&A 실무를 담당한 뒤 KB증권으로 이동해 현대증권 인수 이후 통합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후 KB증권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을 역임하며 주요 경영 현안을 다뤘다. M&A와 인수 후 통합, 재무·전략 업무를 두루 경험한 그가 KBI의 체질 개선과 성장전략을 짜는 역할을 맡은 배경이다.
그가 KBI에서 처음 마주한 과제는 성장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웠다. 인수 초기 60%대에 달했던 잠재부실대출(LAR)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5000명에 달하던 인력을 2800명 수준까지 줄였고 비효율 점포도 통폐합했다. 지난해 현지 회계기준으로 첫 연간 흑자를 내면서 구조조정의 성과가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한 CSO의 시선은 이미 그 다음 단계로 향하고 있다.
◆ “정부 돈은 국영은행으로”…출발선부터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
한 CSO는 인도네시아 금융시장을 단순히 2억8000만명의 거대 내수시장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은행 숫자는 100곳이 넘지만 자산과 수신·여신은 소수 대형은행에 집중돼 있고, 특히 국영은행은 정부·공공부문 자금에 대한 접근성을 바탕으로 외국계 은행보다 유리한 조달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다난타라’라는 국부펀드를 만들어 국영기업 주식을 모으고 국책은행에 자금을 공급하는 등 현지 대형은행 중심으로 시장이 돌아가고 있다”며 “사기업이나 외국계 은행 입장에서는 자금 조달부터 출발선이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자금이 소수 자산가와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구조도 후발 외국계 은행에는 부담이다. 일반 개인 고객의 예금 여력이 크지 않은 만큼 촘촘한 지점망을 구축해 리테일 수신을 빠르게 늘리는 전략에도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한 CSO는 “현지에서는 ‘상위 1%가 전체 예금의 90%를 쥐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금이 소수에 집중돼 있다”며 “일반 리테일 고객의 예금 기반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소수 자산가에게 자금이 집중돼 있다는 현지 금융권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업금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금과 거래가 대기업에 집중돼 있는 만큼 은행 입장에서는 홀세일 금융을 외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CSO는 “일각에서는 리테일 확대를 턴어라운드의 해법으로 제시하지만 중산층이 충분히 두껍지 않은 현지 경제구조에서 시장 흐름을 거슬러 무작정 리테일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대출 포트폴리오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대기업 중심의 홀세일(도매) 금융을 당분간 안정적인 기반으로 유지해야 하는 이유”라고 짚었다.
◆ “현지화만이 답 아니다”…'한국계 프리미엄'으로 승부
한 CSO가 이 같은 시장구조에서 찾아낸 돌파구는 역설적으로 ‘한국계’라는 정체성이다. 해외 금융사업에서 현지화는 필수적이지만, 기업금융에서는 KB금융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금융 전문성을 갖춘 한국계 인력 역시 현지 은행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 CSO는 “제가 만난 인도네시아 기업 오너들을 보면 로컬 직원보다 금융 지식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한국인 디렉터와 직접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현지 은행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화금융이나 홍콩·싱가포르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신디케이션(공동대출) 수요를 정확하게 파악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전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한국계 기업 전담 조직인 ‘코리아 링크’다. 코리아 링크 여신 규모는 2021년 말 4000억루피아에서 지난해 말 6조7000억루피아로 16배 이상 증가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금융 수요를 확보하는 동시에 KB금융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구조화금융과 신디케이션 등으로 기업금융 영역을 넓힌 결과다.
KBI는 코리아 링크에서 축적한 기업금융 역량을 현지 우량 대기업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거래하며 확보한 현지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로컬 대기업과의 접점을 넓히고, 이들이 해외 투자나 대규모 자금조달에 나설 때 KB금융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결국 KBI가 택한 길은 현지 대형은행과 점포 수나 가격으로 정면 승부하는 방식이 아니다. 한국기업 네트워크와 KB금융의 글로벌 구조화금융 역량을 결합해 현지 은행이 충분히 채우지 못하는 기업금융 수요를 공략하는 전략이다. 한 CSO가 말하는 ‘한국계 프리미엄’의 핵심이다.
◆ 미래 먹거리는 '디지털'… 5년 내 20위권 ‘1티어’ 목표
현재의 성장축이 우량 기업금융이라면 다음 승부처는 기업금융에서 확보한 고객 기반을 디지털 리테일로 연결하는 것이다. KBI는 젊은 인구와 높은 모바일 금융 수요를 겨냥해 모임통장과 비대면 급여이체 신용대출(페이롤론) 등 현지 고객을 겨냥한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출발점은 기업금융이다. KBI가 대출을 제공하는 기업의 급여이체 계좌를 함께 유치하고 임직원을 개인 고객으로 확보한 뒤 페이롤론과 모임통장 등 일상적인 금융상품으로 거래를 넓혀가는 방식이다. 기업금융에서 확보한 고객 접점을 개인 수신과 리테일 여신으로 확장하는 셈이다.
이는 저원가성 예금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국영은행보다 조달 여건이 불리한 KBI 입장에서는 기업 임직원의 급여계좌와 생활자금을 끌어들여 안정적인 리테일 수신 기반을 구축해야 자산 성장에 필요한 조달비용 부담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오프라인 영업망의 역할도 다시 설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만성 적자 점포를 통폐합하며 비용을 줄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남은 170여개 점포의 생산성을 높이는 단계로 넘어갔다.
한 CSO는 “과거 만성 적자 점포를 줄이는 단계를 지나 이제는 남은 170여개 전국 영업점이 리테일과 우량 중소기업 여신을 끌어오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영업력을 보강하고 있다”고 말했다.
KBI가 제시한 첫 번째 이정표는 향후 5년 내 현지 은행 20위권 진입이다. 이후에는 단순히 자산 규모가 큰 은행을 넘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1티어’ 금융회사로 올라선다는 구상이다. 정상화를 위해 몸집을 줄였던 지난 6년과 달리 앞으로는 기업금융과 디지털 리테일, 기존 영업망의 생산성을 동시에 끌어올려 성장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한 CSO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연간 6000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KB금융그룹의 확고한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현지 ‘1티어’ 은행으로 도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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