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지 기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누가 발행할지를 놓고 논쟁하는 사이 국내 기업들은 이미 확보한 기술조차 제대로 사업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발행 주체를 정하는 데 매달리기보다 무역결제와 인공지능(AI) 에이전트 결제 등 구체적인 사업을 먼저 허용하고 시장에서 활용처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토론자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가능성보다 이를 막고 있는 제도적 장벽을 걷어내는 게 시급하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가상자산과 외환 등으로 쪼개진 인허가 체계를 정비하고 기업이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서비스를 시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여러 사업자가 참여하는 공동 인프라로 설계할지, 최소한의 규칙만 두고 민간 경쟁에 맡길지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17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딜사이트 블록체인 조찬 간담회 '디지털자산기본법 시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미래'에 참석한 학계와 법조계,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 방향과 실제 사업화를 가로막는 규제, 활용처 확대 방안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코인 받으면 달러 못 보내고…'반쪽 규제'에 막힌 사업화
토론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지적된 문제는 업권별로 쪼개진 현행 인허가 체계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해외송금이나 무역결제를 하려면 가상자산과 외환 업무가 하나의 서비스 안에서 연결돼야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이를 한 사업자가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상자산사업자(VASP)는 스테이블코인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달러로 환전해 지급하려면 별도의 외국환업 관련 자격이 필요하다. 반대로 외국환업 자격을 보유한 사업자는 가상자산을 직접 취급하기 어렵다.
류춘 헥토월렛원 부대표는 "가상자산사업자가 코인을 받더라도 이를 환전해 달러 지급을 지시하려면 업무 범위에 따라 별도의 외국환 관련 라이센스가 필요하다"며 "반대로 외국환 관련 라이센스만으로는 코인을 받을 수 없어 두 제도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종 자금 처리 단계에서 은행에 책임이 집중되는 구조도 사업 확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혔다. 스테이블코인을 달러로 전환한 뒤 실제 자금을 입금하고 송금하는 단계는 은행이 맡는다. 자금 출처와 제재 대상 여부, 이상 외화송금 등에 관한 책임도 은행이 부담하게 된다.
류 부대표는 "가상자산을 달러로 바꾼 뒤 최종적으로 자금을 처리하는 곳은 은행"이라며 "은행 외환 담당자가 이상송금에 대한 책임을 모두 부담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서병윤 DSRV 공동대표는 문제의 원인이 기술보다 제도와 실행 속도에 있다고 진단했다. 무역결제와 AI 에이전트 결제를 구현할 기술은 이미 갖췄지만 당국이 구체적인 허용 범위와 일정을 제시하지 않아 기업들이 사업에 착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 대표는 "기술이 없어서 무역결제나 AI 에이전트 결제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며 "정부가 2027년 상반기까지 서비스를 출시한다는 식으로 목표를 정하고 당국과 업계가 함께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완벽한 제도 기다리지 말고…"용도 제한해서라도 먼저 실험"
규제 체계를 한꺼번에 완성하기보다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고 용도가 명확한 영역부터 단계적으로 허용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강형구 한양대 교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국내 일반 결제수단으로만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업 내부 정산이나 무역대금 결제처럼 사용 범위가 분명한 분야부터 제한적으로 허용하면 통화주권이나 자본 유출 등에 대한 우려를 낮추면서 사업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외부로 유통하지 못하더라도 기업들이 내부에서 사용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만들 수 있다"며 "국제 무역에만 사용하도록 용도를 한정하는 방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AI 에이전트 간 거래도 선제적으로 실험해야 할 시장으로 꼽았다. 해외에서는 AI가 데이터와 콘텐츠,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 등을 구매하고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결제 방식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국내에서도 관련 사업모델을 시험할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 교수는 원화를 출발점으로 다른 통화와 토큰화 자산까지 연결하는 개방형 플랫폼 구축도 제안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와 태국 바트 등 다른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까지 국내 플랫폼에서 발행·거래할 수 있도록 하면 한국이 디지털 외환시장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규제 영역이 금융과 외환, AI·블록체인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만큼 범부처 차원의 대응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종원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장은 "금융위원회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 부처에 맡겨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며 "실행 권한을 가진 범부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업계와 지속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니는 사용처 실험…한국도 '쓸 곳' 만들어야
해외에서는 완성된 시장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구체적인 사용처를 정해 스테이블코인을 실제 서비스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개도 나왔다.
서상민 카이아 DLT재단 의장은 일본에서 외국인 관광객의 세금 환급금을 엔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출국을 앞둔 관광객이 엔화 현금 대신 디지털 지갑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받아 온라인이나 다음 방문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을 활용해 QR 결제사업자와 은행 사이의 정산 시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실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비자의 결제는 즉시 처리되지만 사업자 간 정산에는 시간이 걸려 별도 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를 블록체인으로 보완하려는 시도다.
서 의장은 해외 사례의 핵심이 기술뿐 아니라 당국과 민간이 함께 사업모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봤다. 싱가포르 금융당국의 소통 방식을 국내가 참고할 사례로 제시한 이유다.
그는 "싱가포르 금융당국 관계자들은 업계 행사에서 직접 제도 방향을 발표하고 토론에도 참여한다"며 "국내에서도 금융당국과 업계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법안을 수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초기 사용처로는 토큰화 금융자산이 제시됐다. 함성진 아톤 경영전략본부장은 토큰화 금융자산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함께 제도화해 초기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토큰화된 금융상품의 거래·정산 수단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연결하면 활용처와 유동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함 본부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 뒤 국민이 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금융자산의 토큰화와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을 함께 설계하면 초기 활용처와 유동성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 인프라냐 민간 경쟁이냐…시장 설계 놓고 '갑론을박'
실제 사업을 허용하고 활용처를 넓혀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원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지를 놓고는 의견이 갈렸다. 여러 사업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개방형 인프라를 만들어 특정 기업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가 최소한의 규칙만 정한 뒤 민간의 경쟁과 실험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홍은표 블록체인법학회 회장은 특정 기업이 발행과 유통 인프라를 독점할 경우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영향력까지 한 사업자에 집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 회장은 "통화 인프라를 특정 기업이 독점하면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도 가져갈 수밖에 없다"며 "여러 참여자가 함께 개발하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개방형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반면 윤민섭 빗썸 리서치실 실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처음부터 공공적 성격의 인프라로 규정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봤다. 정부의 통제가 강해질수록 민간 사업자가 새로운 사업모델과 사용처를 발굴할 여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다.
윤 실장은 "산업을 인프라로 규정하면 초기에는 빠르게 출발할 수 있지만 이후 통제가 늘어 성장과 혁신이 막힐 수 있다"며 "최소한의 규칙만 정하고 기업들이 창의적으로 활용처를 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 역시 정부가 미리 정하기보다 시장의 실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실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기업 내부 정산과 국제 거래 등 제약만 풀리면 민간이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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