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송한석 기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공급사와 고객사 간 관계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업황에 따라 양측의 협상력이 달라졌다면 최근에는 장기공급계약(LTA)을 통해 수년간 서로 물량을 약속하면서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안정적인 메모리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서기보다 서로 장기간 협력하는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은 최근 대형 고객사를 중심으로 다년간의 LTA를 확대하고 있다. 고객사가 향후 구매할 물량을 미리 확약하면 메모리 업체가 이에 맞춰 생산능력(CAPA)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메모리는 대표적인 사이클 산업으로 꼽혀왔다.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상승할 때는 물량을 쥔 공급사의 협상력이 높아지고 공급과잉으로 돌아서면 고객사가 주문량을 줄이거나 가격 인하를 요구하면서 주도권을 가져가는 구조가 반복됐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최근 이 같은 관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LTA가 확대되면서 공급사와 고객사가 단기적인 수급 상황만을 놓고 거래하기보다 수년간 일정 물량을 주고받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어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면서 고객사 입장에서는 메모리를 얼마나 낮은 가격에 구매하느냐 못지않게 필요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HBM뿐만 아니라 서버용 D램과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등 AI 인프라에 필요한 메모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급사에도 LTA의 이점이 있다. 고객사가 수년간 구매할 물량을 약속하면 향후 수요를 더욱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고 이를 생산능력과 설비투자 계획에 반영할 수 있다. 고객은 공급 안정성을, 공급사는 수요 가시성을 확보하는 구조다.
이 같은 장기 구매 약속의 구속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로 선수금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다년간 공급계약의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상당 규모의 선수금을 계약 조건에 포함했다”며 “이미 상당 부분을 수취했고 향후 전체 잔액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실제 삼성전자의 올 상반기 선수금은 3조2951억원으로 지난해 말 대비 70.4% 늘었다. 통상 부채로 잡힌 선수금은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매출로 인식된다. LTA를 통한 안정적인 수요 확보와 함께 실적에 대한 가시성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메모리 사이클에 따라 공급사와 고객사 간에 상대적으로 위아래가 있었다면 이제는 LTA로 서로 묶이면서 동등하게 잘해보자는 분위기로 달라지고 있다”며 “메모리 업체가 고객사의 눈치를 본다기보다는 서로 안정적으로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도 장기계약을 확대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올해 데이터센터와 소비자·자동차 고객 등을 대상으로 16건의 전략적 고객계약(SCA)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일부 계약에는 고객이 일정 물량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대금을 지급하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 조건이 포함됐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메모리를 만드는 기업은 한정돼 있고 특히 HBM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며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메모리를 확보해야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어 미리 파트너십을 만들고 필요하면 장기계약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LTA 확대가 메모리 산업 특유의 사이클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수요와 공급 변화에 따라 가격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계약 조건 역시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교수는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이 같은 현상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공급 부족이 해결되면 바뀔 수는 있다”고 전했다. 이어 “예전에는 메모리 사이클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메모리 사이클은 좀 옛날이야기 같다”며 “AI 수요가 많아질 때 반도체 사이클, 특히 메모리 사이클도 같이 움직이는 만큼 메모리 사이클이라기보다는 ‘AI 사이클’에 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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