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딜사이트 김태은 기자] 얽히고설킨 채 직선으로 쭉 뻗은 형형색색의 배관을 따라 기자단을 태운 버스가 나란히 달렸다. 거대한 배관 구조물과 원형 저장탱크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래된 배관에 남은 녹 자국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줬고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증기는 원유가 공정을 거쳐 정유·석유화학 제품으로 거듭나는 현장임을 실감하게 했다.
지난 10일 오후 3시경 찾은 울산콤플렉스(CLX)는 60년 넘는 시간 동안 증설과 확장을 거듭하며 형성된 SK이노베이션의 핵심 생산기지다. 1964년 국내 최초 정유공장에서 출발해 1970년대 석유화학 설비를 갖추고 1990년대 대규모 증설을 거쳤다. 최근에는 디지털과 인공지능(AI) 기술이 더해지며 또 다른 진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울산 CLX는 여의도의 3배 규모인 약 250만평으로 3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원유 저장부터 정유·석유화학 제품 생산, 출하까지 모두 이곳에서 이뤄진다. 총 34기의 대형 원유 저장탱크를 갖추고 있으며, 최대 2000만배럴의 원유를 보관할 수 있다.
저장된 원유는 파이프라인을 따라 정유공장으로 이동한다. 울산 CLX에는 1964년 가동을 시작한 국내 최초 정유공장을 포함해 총 5개의 정유공장이 들어서 있다. 하루 최대 84만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고,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제품과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 등을 생산한다.
이 같은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SK이노베이션은 전체 매출의 약 70%를 수출에서 올리고 있다. 울산CLX에는 자체 부두 8곳이 구축돼 있으며, 국내 공급 물량은 송유관과 탱크로리 등을 통해 전국으로 운송된다.
이후 진행된 SK이노베이션 인공지능 전환(AX) 전략 설명회에서 정창훈 SK에너지 제조AI팀장은 "정유·석유화학 공장은 국내 최초 가동 이후 60년이 넘었고 전체 공정 수만 98개에 달한다"며 "설비 안정성에는 문제가 없지만 최적으로 운전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설비 보수와 유지관리를 위해 하루 최대 5000명에 달하는 작업자가 현장에 들어오는 만큼 인력 관리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라며 "2030년이면 숙련 인력의 절반 이상이 퇴직하게 되는 만큼 250만평에 달하는 현장을 사람만으로 순찰하고 관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K이노베이션이 내세운 해법이 '듀얼 브레인(Dual Brain)' 운영 체계다. 듀얼 브레인은 예측·판단을 지원하는 브레인 AI와 현장에서 축적된 인간 작업자의 역량을 결합해 더 빠른 감지·정확한 판단·안전한 실행을 구현하는 운영체계를 의미한다. AI가 24시간 데이터를 분석하고 예측·판단을 수행하면 최종 의사결정은 사람이 담당한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공정 최적화와 설비 예지보전, 안전관리 등 세 분야를 중심으로 AI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공정 최적화 영역에서는 AI 에이전트가 각 공정의 최적 운전 조건을 찾아준다. 일부 공정은 자동공정제어(APC) 시스템과 연계해 AI가 제안한 최적값을 자동 반영하고 있으며, APC가 적용되지 않은 설비는 작업자가 AI가 제시한 값을 참고해 운전한다. 현재 7개의 머신러닝 모델이 현장에 적용됐으며, 추가 활용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실제 중질유분해공정(HOU) 조정실에서는 일부 공정에 APC 시스템이 적용돼 있다. 과거에는 작업자가 온도와 원료 투입량 등 다양한 변수를 직접 조정해야 했지만, 이제는 시스템이 변수 변화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최적 운전 조건을 제시하면서 운영 효율을 높이고 있다.
설비 관리 분야에서는 AI 기반 예지보전 체계 구축이 진행 중이다. 펌프와 압축기 등 회전기계의 고장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고 향후에는 원인 분석과 조치 방안까지 제시하는 것이 목표다. 정 팀장은 "5~6년 전에는 신뢰도가 낮았지만 최근 2년간 모델 성능이 크게 향상됐다"고 말했다.
안전관리 분야에서는 자체 플랫폼 '쉴드(SHEild)'를 활용하고 있다. CCTV와 작업허가, GIS(지리정보시스템)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현재는 24시간 현장 관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향후 AI 기반 위험 예측과 현장 통제 기능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정 팀장은 "향후에는 관제센터가 아닌 관제 플랫폼, 관제사가 아닌 AI 에이전트 중심 체계로 진화할 것"이라며 "로봇과 드론 CCTV 데이터를 통합해 현장을 관리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는 AI 도입이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에는 선을 그었다. 정 팀장은 "인력 축소보다는 조직을 얼마나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며 "인력 집약적 산업이 아닌 만큼 AI 적용을 통한 효율화로 인력이 축소된다는 것과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까지 AI 기술의 신뢰도를 검증한 데 이어 올해부터 현장 적용을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 관련 기술의 80~90%가 현장에 적용된 가운데, 연간 1000억원 수준의 생산성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생산성 개선 효과가 가장 두드러질 것으로 보는 분야는 에너지 관리다. 울산CLX는 스팀과 전기, 수소, 연료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에너지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어 AI를 활용해 전체 최적점을 찾을 경우 비용 절감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스팀 네트워크 최적화 모델을 적용하고 있으며 향후 연료·수소·전기 영역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장기적으로 AI 플랫폼의 사업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울산CLX에서 효과와 신뢰도를 검증한 뒤 다른 정유·석유화학 기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이다.
정 팀장은 "결국 동종사 등 외부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성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룹 내 IT 계열사인 SKAI와 협의해 나가고 있으며, 향후 플랫폼의 라이선스 제공 등을 통해 사업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60년 역사의 정유·석유화학 공장은 여전히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다만 그 공장을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수십 년간 축적된 현장 경험 위에 AI라는 새로운 두뇌를 더하면서, 울산CLX는 '사람과 AI가 함께 운영하는 공장'으로의 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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