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광호 기자] 코스닥 상장사 A사는 최근 수백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추진하다 ‘벽’에 부딪혔다. 금융감독원으로부터 60여쪽에 달하는 대규모 정정요구서를 통보받았지만, 발행사와 주관사 입장에서는 무엇을 어느 수준까지 보완해야 심사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전언이다.
중소·중견기업 유상증자 딜에 특화된 증권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심사관이 인공지능(AI)으로 대충 서류를 만들어 보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미 증권신고서에 지분 희석과 경영권 영향, 자금 사용 목적 등을 상세하게 기재했는데도 광범위한 추가 보완 요구가 이어지고, 이를 반영한 뒤에도 추가 정정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불만이다.
금감원이 투자자 보호를 위해 부실한 증권신고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IB업계가 문제 삼는 것은 심사의 강도보다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이다. 수십쪽에 달하는 정정요구를 받고 이를 반영해도 추가 정정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른바 ‘깜깜이 심사’가 이어지면서 자금조달 일정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1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A사가 받은 정정요구서에는 재무·사업 현황부터 자금 사용 목적과 지배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보완 요구가 담긴 것으로 파악됐다. 발행사와 주관사가 요구사항을 반영해 정정신고서를 제출하더라도 심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금감원이 추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다시 정정을 요구할 수 있고, 정정이 반복될수록 당초 계획한 발행 일정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실제 최근 유상증자 시장에서는 여러 차례 정정 절차를 거친 뒤 자금조달 계획을 접는 사례도 나타났다. 썸에이지는 지난달 5일 유상증자를 철회했다. 4월 최초 신고 이후 금감원의 정정신고서 제출 요구에 따른 정정 2회와 자진정정 2회를 거쳐 효력이 발생했지만, 절차가 길어지는 동안 재무여건과 시장상황이 달라지고 관리종목 지정 우려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계획을 접었다. 하이퍼코퍼레이션도 같은 달 27일 금감원의 정정요구 및 보완 검토에 따라 유상증자 추진이 장기화됐다는 점 등을 들어 계획을 철회했다.
개별 기업의 유상증자 철회를 금감원 심사만의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기업의 재무상황과 주가, 증자 조건, 시장 여건 등 여러 변수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썸에이지 역시 정정 절차 자체보다는 장기화 과정에서 불거진 관리종목 지정 우려 등이 철회의 직접적인 배경에 포함됐다. 업계가 주목하는 지점은 자금조달이 시급한 기업일수록 심사기간을 예측하기 어려워질 경우 조달 계획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증권사 IB 관계자는 “정정명령서를 던져 3~4차 정정까지 가며 서류가 수백 쪽으로 불어나는 건 결국 회사더러 자금 조달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최근에는 정정명령서를 매번 수십 장씩 쓰기 피곤해지니 2차 정정 단계부터 주관사 대표이사 확약서를 내라고 압박해 아예 자금 조달을 접게 만들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금감원은 오는 11월부터 증권신고서 작성 수준에 따라 정정요구 방식을 레벨(Level) 1과 레벨 2로 차등화한다. 1차 정정 이후에도 중요 요구사항의 상당 부분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레벨 2로 분류한다. 레벨 2에서는 구체적인 미비 내용을 다시 적시하기보다 ‘정정요구 사항 반영이 미비했다’는 취지를 전달할 방침이다.
금감원이 투자자 보호를 위해 심사 강도를 높이는 것과 별개로, 업계에서는 여기서 또 다른 ‘정보 비대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금감원은 레벨 2 적용 사실을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개해 ‘투자정보로서 활용도’를 높이고 ‘Name & Shame 효과’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투자자는 해당 기업이 금감원의 정정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결과는 알 수 있지만, 정작 금감원이 무엇을 문제 삼았고 회사가 어떤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최근 금감원의 심사 강화 배경을 두고 이른바 ‘코스닥 회장(선수)’들이 개입한 일부 기업의 무리한 유상증자를 차단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금감원이 공식적으로 밝힌 제도 취지는 부실한 증권신고서의 반복 제출을 막고 투자자 보호와 심사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기업과 신고서가 부실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근거가 시장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위험 차단과 과도한 심사를 외부에서 구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기존 소액주주의 이해관계 역시 단면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실기업의 무리한 유상증자로 지분 희석과 추가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도 투자자 보호다. 반대로 정상적인 자금조달까지 사실상 막힐 경우 재무구조 개선이나 사업 정상화 가능성이 낮아져 기존 주주가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다.
시장 관계자는 “감당국이 한계기업 딱지를 붙여 자금 조달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면 그 회사에 투자한 기존 소액주주들은 그대로 고사한다”며 “그 사람들도 엄연한 투자자인데 대체 누구를 위한 보호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논란을 줄이기 위한 해법으로 금감원의 정정요구서 자체를 시장에 공개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발행사가 희망할 경우 정정신고서를 공시하면서 금감원의 정정요구서 원문과 이에 대한 회사 측 답변을 함께 첨부하는 방식이다. 투자자가 최종 정정신고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당국이 어떤 부분을 문제 삼았고 기업이 어떻게 소명·보완했는지를 직접 판단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공시 심사 방식도 비교 대상으로 거론된다. SEC 역시 증권신고서 등에 보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질의서(Comment Letter)를 보내 추가 설명이나 공시 수정을 요구하고 기업은 이에 답변한다. 쟁점이 해소되지 않으면 여러 차례 질의와 답변이 오갈 수 있으며, 기업이 코멘트의 의미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담당 심사자에게 설명을 요청할 수도 있다.
국내와 눈에 띄는 차이는 심사 과정에서 오간 서신을 사후에 시장에 공개한다는 점이다. SEC는 등록신고서의 효력이 발생하거나 심사가 완료된 뒤 최소 20영업일이 지나면 SEC가 기업에 보낸 질의서와 기업이 제출한 답변을 EDGAR(미국 전자공시시스템)에 공개한다. SEC 발송 문서는 ‘UPLOAD’, 기업 답변은 ‘CORRESP’ 유형으로 조회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심사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자자는 사후에라도 감독당국이 무엇을 문제 삼았고 기업이 어떤 논리와 자료로 답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모든 정정요구를 즉시 공개하기보다 심사가 마무리된 뒤 영업기밀 등을 제외한 정정요구서와 기업 답변을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금감원이 레벨 2 지정 사실 자체를 ‘투자정보’로 활용하겠다면 그 판단의 근거까지 시장에 제공해야 투자자가 기업과 감독당국 양측의 판단을 비교할 수 있다는 논리다.
IB 관계자는 “증권사가 충실히 기재했는지, 감독당국이 무리한 잣대를 대었는지 시장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원문 공시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회사들이 기업 기밀이라 공개를 원치 않는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감독당국 스스로 무리한 심사 실태가 밝혀질까 봐 숨기는 것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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