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규희 차장] 자본시장에서 돈은 혈액과 같다. 막힌 곳을 뚫어주고 마른 곳을 적셔줄 때 비로소 경제의 실핏줄이 살아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피라도 한꺼번에 과도하게 주입되면 몸 전체에 과부하가 걸린다. 자본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소화 능력을 넘어선 돈이 짧은 시간에 몰리면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가격 발견 메커니즘이 흔들리고 자산의 본질적 가치가 흐려질 수 있다.
오는 10월 시장에 동시 출격하는 국민성장펀드 간접투자 1·2차 자펀드가 꼭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 자펀드의 전체 규모는 11조원에 달한다. 11조원이 당장 한꺼번에 기업에 집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자금을 운용해야 하는 펀드들이 비슷한 시기에 투자처 발굴과 집행에 나선다는 점에서 시장이 체감하는 압박은 작지 않다. 정책금융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막대한 규모다. 통상 대규모 자금 유입은 투자 혹한기에 시달리던 벤처와 성장 기업들에 단비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자본시장의 기류는 기대보다 불안과 당혹감에 가깝다. 쏟아지는 자금의 규모에 비해 이를 건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투자처가 충분하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량 투자처의 절대적 부족에서 비롯된다. 돈이 필요한 기업이 많다는 것과 대규모 자금을 책임 있게 받아 성장으로 연결할 기업이 많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대규모 자금을 책임감 있게 흡수해 기술 혁신과 실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기업 풀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특히 고금리와 경기 둔화 여파가 여전한 지금 시장의 검증을 통과한 유망 기업은 더욱 제한적이다. 자금 공급의 규모와 시장의 소화 능력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환경이다.
여기에 펀드 운용사(GP)들이 짊어진 자금 소진 압박이 기름을 붓는다. 펀드는 정해진 투자기간과 주목적 투자 요건 등에 맞춰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 집행이 늦어질수록 운용사로서는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계좌에 머무는 순간 정책적 명분도 훼손된다. 결국 운용사들은 시간에 쫓겨 좋은 투자처를 충분히 선별하는 것과 자금을 적기에 집행하는 것 사이의 구조적 딜레마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조급함은 시장의 본질적인 문법을 뒤흔들고 있다. 과거에는 유망 기업이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기술력과 사업성을 증명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지금은 정반대다. 운용사들이 한정된 알짜 기업을 찾아가 제발 투자를 받아달라며 매달리는 기현상이 일상화됐다. 조금이라도 사업성이 엿보이는 기업에는 수많은 펀드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투자 유치 경쟁이 아니라 자금을 집행하기 위한 경쟁으로 시장이 변질된 셈이다.
그 결과 기업 가치가 펀더멘털보다 빠르게 치솟을 위험도 커진다. 기업의 본원적 경쟁력이나 실적 개선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과잉 공급 자체가 몸값을 끌어올리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자금 소진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하는 운용사 입장에서는 높은 밸류에이션을 감수하고서라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유인이 커진다. 시장의 합리적 가격 조정 기능이 약화되고 거품이 자랄 수 있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인위적으로 부풀려진 기업 가치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후속 투자 유치 단계에서 이전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기업은 심각한 자금 경색에 직면하게 된다. 높아진 몸값을 유지하지 못하면 다운라운드를 감수해야 하고, 기업공개(IPO)에 나서더라도 투자 단계에서 인정받은 기업가치를 시장에서 다시 증명해야 한다. 기업공개나 인수합병 같은 회수 시장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큰 현실을 고려하면 이 같은 밸류에이션 왜곡은 펀드의 수익률 악화는 물론 정책금융 전체의 건전성을 갉아먹는 뇌관이 될 수 있다.
정책금융의 성패는 단순히 자금을 얼마나 빠르게 소진했느냐는 수치로 증명되지 않는다. 진정한 정책의 미덕은 자금 공급의 속도가 아니라 그 자금이 건강한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하는 정교한 완급 조절에 있다. 11조원의 거대한 자본이 맹목적인 속도전에 휘말리지 않고 냉철한 선별과 인내를 거쳐 안착할 수 있도록 투자기간을 시장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단순한 집행 속도가 운용사의 성과를 좌우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완충 장치를 열어두는 것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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