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민기 산업1부 부장] 메모리 반도체 업황을 관통하는 핵심 지표는 단연 '가격(P, Price)'과 '출하량(Q, Quantity)'이다. 두 축의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역상관관계는 반도체 시장 특유의 냉혹한 사이클을 만들어낸다. 통상 시장 내 공급(Q)의 과잉은 가격(P) 폭락을 야기하고, 제조사의 인위적인 공급 통제는 다시 판가 반등을 이끄는 식이다.
전방 정보기술(IT) 고객사의 구매 패턴을 보면 이 메커니즘은 더욱 명확해진다. 공급이 늘어 단가 하락이 예견되는 국면에서 고객사는 구매 계약을 철저히 지연시킨다. 단가 1달러의 차이가 수백억 원의 비용 절감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반면 쇼티지(공급 부족)가 발생하면 상황은 180도 역전된다. 당장의 부품 조달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물량을 싹쓸이하는 '패닉 바잉'이 일어난다. 이때 시장의 주도권은 완벽히 반도체 제조사(공급자)에게 넘어간다.
현재 메모리 시장은 'AI(인공지능)'라는 전례 없는 훈풍을 타고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다. 폭발적인 수요를 공급이 쫓아가지 못하면서 기업들이 팹(Fab) 가동률을 100%로 끌어올려도 '부르는 게 값'인 실정이다. 심지어 제조사가 구두 계약 때보다 정식 계약 단계에서 더 높은 단가를 부르는 '셀러 마켓(Seller's Market)' 현상마저 연출되고 있다.
최근 정부가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장기적으로 도합 3200조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로드맵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업황 호조에 기인한다. 서남권 신규 메모리 팹 구축에만 총 800조원을 쏟아붓고, 양사가 각각 400조원을 투입해 전공정 팹 2기씩을 건설한다는 매머드급 구상이다. 지난해 삼성전자 DS부문(47조원)과 SK하이닉스(30조원)의 연간 설비투자(CAPEX) 규모를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수치다.
당장 업계의 셈법은 복잡하다. 마이크론의 추격과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넥스트 용인', '넥스트 평택'을 선제적으로 구상해야 하는 것은 맞다. 인플레이션과 환율 등을 고려할 때 3층 규모 팹 1기당 150조~200조 원이 소요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부지 제공과 세제 혜택을 약속한 정부의 제안은 기업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카드다.
문제는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인 '다운사이클(하락 전환기)'이다. AI 인프라 선점 경쟁을 벌이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중 투자를 포기하거나 데이터센터 임대 수익 모델로 전환하는 곳이 늘어나는 순간, 메모리 수요는 급감하게 된다. Q의 과잉이 P를 짓누르는 전형적인 침체 국면의 시작이다.
이때부터는 판가(P)와 제조원가(Cost) 간의 치열한 벼랑 끝 전술이 펼쳐진다. 가격이 원가 밑으로 추락하면 대규모 적자가 누적되고, 급증한 과잉 재고는 수조 원대 재고평가손실이 돼 기업의 재무구조를 옥죈다. 버티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되는 냉혹한 '치킨 게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 시기가 도래했을 때, 과연 우리 기업들은 수백조원의 추가 투자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일정도 당초 계획보다 무리하게 앞당긴 상태다. 용인과 평택 라인이 본격 가동될 시점에 대대적인 사이클 조정이 닥친다면, 서남권 800조원 투자 계획은 전면 보류되거나 재검토될 공산이 크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용인과 서남권 클러스터를 동시 구축하겠다는 정부의 청사진은 산업 현장의 현실을 철저히 도외시한 결과다. 이미 용인과 평택 라인에 건설사, 협력사, 핵심 인력이 총동원된 탓에 추가 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입지 선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모적인 논쟁까지 고려하면 첫 삽을 뜨는 데만 수년이 걸릴 수 있다.
결국 3200조원이라는 숫자는 웅장하지만, 실현되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릴 수 있는 먼 미래의 이야기다. 기업들은 업황 사이클에 따라 의도적으로 투자를 지연시키거나 감산 카드를 꺼내며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대비한 거시적 안목의 투자 로드맵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당장 용인 클러스터의 성공적 안착조차 벅찬 시점에서 섣불리 서남권 메가 팹을 논하는 것은, 닻도 올리지 않은 배가 만선을 기대하는 격이다. 선언적인 구색 맞추기식 발표에 매몰되기보다 기업의 실질적 투자 체력과 글로벌 사이클을 고려한 촘촘하고 현실적인 산업 육성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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