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세정 기자] 국내 고급 백판지 시장 1위 한창제지가 지난해 오너 3세 경영을 본격화했지만 첫해 성적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이다. 김준영 사장이 대표이사와 최대주주 지위를 모두 확보하자 회사가 영업손실과 순손실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가격 인상과 설비투자 효과가 본격화되는 올해 김 사장의 경영 능력을 입증할 분수령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1973년 설립 ‘고급 백판지 1위’…두 차례 워크아웃
1973년 고(故) 김종석 명예회장이 설립한 한창제지(옛 한창제지공업)는 백판지와 식품포장용 판지 전문 회사로 입지를 다졌으며, 1987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는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수년간 적자가 누적된 데다,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지급보증관계인이던 한창의 경영이 악화되면서 1998년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 절차) 업체로 선정된 것이다. 회사는 혹독한 원가절감과 경영혁신, 사명 변경 등을 추진한 끝에 약 4년 만인 2002년 워크아웃 졸업에 성공했다.
오너 2세인 김승한 회장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시점은 2000년이다. 김 회장은 공격적인 주식 매집 뿐 아니라 관계사가 보유한 한창제지 주식을 대거 인수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하지만 한창제지는 2008년 또 다시 워크아웃에 돌입하게 됐다. 세계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키코(KIKO) 손실에 더해 중국산 판지 공급과잉 등이 겹치면서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한창제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산업은행(산은)을 대상으로 150억원 규모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하며 자금을 융통했고, 감자도 진행했다. 그 결과 김 회장 지분율은 31%에서 5%로 급감했다. 김 회장이 경영권을 되찾은 것은 2014년이다. 당시 채권단(산은·신한은행·서울보증보험 등)은 기 보유 중이던 한창제지 지분 43.75%의 절반 수준인 21.3%를 우선매수권을 가진 김 회장과 친인척 등에 매각했다. 김 회장 지분율은 종전 9.14%에서 17.15%로 증가했고, 단일 최대주주 지위도 되찾았다. 이후 한창제지는 2016년 2차 워크아웃에서 벗어났다.
오랜 기간 채권단 공동관리와 전문경영인 체제를 거치며 회사의 정상화를 후방에서 지원해 온 김 회장은 2023년에서야 공식 대표이사 직함을 달았다.
◆ 후계 구도, 차남→장남 ‘확정’…김준영 사장, 美 국적 금융전문가
한창제지 승계 구도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지난해다. 당초 김 회장 후계자로는 김 회장 차남인 김준우 영우인터내셔널 대표이사가 유력하게 거론돼 왔다. 장남인 김준영 사장이 외국 국적인 데다, 당시에는 차남 지분율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창제지 주요 주주인 영우인터내셔널의 경우 차남이 최대주주라는 점도 이러한 관측에 힘을 실었다.
실제로 2016년 말 기준 김준영 사장의 한창제지 지분율은 4.78%이었고, 김준우 대표는 5.88%로 1.1%포인트(p) 격차를 보였다. 하지만 김준영 사장은 2017년 장내매수를 거쳐 지분율을 5.88%까지 끌어올렸다.
김준영 사장과 김준우 대표가 수년간 유지하던 지분율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24년 7월이다. 김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70% 가량을 장남에게 증여했고, 김준영 사장의 지분율은 18%에 달하게 됐다. 이를 두고 사실상 차기 회장으로 김준영 사장이 낙점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나아가 김 회장은 대표 취임 2년 만인 지난해 3월 사임하며 장남에게 경영 바통을 넘겼다. 김 사장이 대표이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최대주주 지위를 모두 확보하며 사실상 경영 승계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반면 차남은 약 4개월 뒤인 지난해 7월 영우인터내셔널 대표이사를 맡으며 독자적인 경영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1983년생인 김준영 사장은 미국 코넬대학교를 졸업한 금융 전문가로 알려졌다. UBS AG 홍콩지점에서 이사를 역임했고, 2020년부터는 한창제지 전략기획팀장으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동생 김준우 대표는 1986년생이라는 것 외에는 공개된 정보가 제한적이다.
◆ 작년 원가부담 탓 수익성 부진…올해 호실적 기대감
김준영 사장 체제에서 한창제지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예컨대 한창제지는 지난해 매출 2670억원과 영업손익 마이너스(-) 5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9.3% 감소했으며, 영업손익은 적자전환했다. 같은 기간 순손익 역시 -131억원으로 음수로 돌아섰다.
한창제지의 실적이 악화된 주된 요인으로는 업황 둔화에 따른 매출원가 부담 확대를 꼽을 수 있다. 2024년 말 기준 90.4%이던 매출원가율은 지난해 92.9%로 2.5%p 상승했다. 제지업은 고정비 부담이 큰 장치산업인 만큼 매출 감소가 곧바로 원가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특히 한창제지는 판매비와관리비를 전년 대비 10.7% 가량 축소했지만, 적자 전환은 방어하지 못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올해부터 실적 반등이 예상되는 만큼 김준영 사장의 경영 능력 입증이 한층 수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창제지는 올 1분기 말 매출 656억원과 영업이익 17억원을 달성했다. 매출은 전년과 유사한 수준을 이어갔지만, 매출 대비 원가 비중을 88%까지 떨어트린 덕분에 영업손익 흑자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아울러 한창제지는 약 7억원의 순이익을 내기도 했다.
한창제지는 제지산업의 사양화 흐름에도 지속적인 설비 투자를 단행해 왔다. 백판지 산업은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인 만큼 대규모 설비 투자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소수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는 구조다. 특히 기업 간 기술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만큼 원가 경쟁력이 시장 점유율을 좌우한다. 한장제지의 자본적지출(CAPEX)은 설비 효율화와 자동화 시스템 구축 등 원가 경쟁력 확보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최근 5년간(2021~2025년) 한창제지의 CAPEX(자본적지출)는 267억원으로, 같은 기간 누적 영업이익(35억원)을 크게 상회한다. 단순 회계상 영업이익만 보면 무리한 투자로 비춰질 수 있지만, 실제 현금창출력을 나타내는 재무 지표를 보면 상황이 다르다.
대규모 감가상각비가 반영되는 장치산업의 특성상 현금흐름은 견조하게 유지됐다. 실제로 이 기간 한창제지가 창출한 누적 영업활동현금흐름은 271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EBITDA 역시 CAPEX의 2.5배 수준으로, 설비투자 부담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익창출력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더해 올 2월부터 백판지 가격 인상에 따른 판가 상승 효과가 본격적으로 반영될 경우 실적 턴어라운드가 가능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독립 리서치인 아이브이리서치는 “한창제지의 주요 고객사는 삼성전자와 KT&G 등으로 안정적인 수요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며 “업황 둔화 시기에 진행된 선제적 설비 투자는 향후 수요 회복 국면에서 실적 레버리지로 작용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업황 부진으로 경쟁사들의 투자 여력이 약화된 만큼 시장 재편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한창제지 관계자는 “김준영 대표로 승계 구도가 확정됐다”면서 "최근 몇 년 간 실적이 좋지 않았던 만큼 시장의 신뢰가 많이 약해졌지만, 올해를 턴어라운드 원년으로 삼아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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