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구예림 기자] 한국수출입은행이 설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벤처투자조합 출자에 나섰다. 기존 대출·보증과 직접투자 중심의 정책금융에서 한발 더 나아가 벤처투자조합 출자를 통해 성장단계 기업에 모험자본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지원 수단을 넓히는 행보다. 황기연 수은 행장이 지난해 11월 취임 이후 강조해온 ‘포용성 있는 생산적 금융’이 벤처투자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수은은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투자가 추진하는 ‘LP성장펀드’의 방산·공급망 분야 연합출자자로 참여해 총 1125억원 규모의 펀드 조성에 착수했다. 수은과 공급망안정화기금이 각각 200억원을 출자하고, 지역 거점 금융사인 BNK부산은행과 BNK경남은행도 각각 100억원을 출자한다. 현재 위탁운용사(GP) 선정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수은이 벤처투자조합에 유한책임조합원(LP)으로 참여하는 것은 1976년 설립 이후 처음이다.
투자 대상은 동남권 소재 방산·공급망 분야 기업이다. 무기체계 완제품과 부품·소재뿐 아니라 드론·로봇·인공지능(AI) 등 국방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첨단기술 기업과 공급망 핵심품목 관련 기업까지 포함된다.
이번 벤처투자조합 출자는 황 행장이 취임 이후 내세운 ‘포용·모험·인내금융’과 맞닿아 있다. 황 행장은 올해 2월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은의 설립 목적을 ‘생산적 금융’이라고 강조하면서 "정책금융의 혜택이 대기업에 집중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왔다. 당시 AI 등 유망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벤처펀드를 비롯한 투자 기능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수출계약이나 대기업 납품실적을 갖춘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기존 지원에서 나아가 지역 중소·중견기업까지 정책금융의 온기를 넓히겠다는 복안이다.
벤처투자조합 출자는 수은이 정책금융을 공급하는 시점을 기업의 수출 이후에서 성장단계로 앞당길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아직 수출 실적이나 안정적인 납품처를 확보하지 못해 기존 수출금융의 지원 요건을 갖추기 전 단계에 있는 기업도 전문 운용사의 심사를 거쳐 기술력과 성장성을 인정받으면 투자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공급망에 진입하거나 자체 수출에 나설 경우 수은의 기존 정책금융으로 연계할 수도 있다.
이 같은 투자 확대에는 제도적 기반 마련도 영향을 미쳤다. 수은법 개정에 이어 지난 6월 시행령까지 정비되면서 수은이 벤처투자조합과 신기술사업투자조합에 출자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 그동안 수은은 벤처투자조합에 LP로 참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자본시장법상 사모펀드(PEF)나 특정 기업을 지정해 투자하는 프로젝트펀드 등을 중심으로 자금을 집행해왔다. 법령 정비로 전문 운용사가 다수의 유망기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블라인드 펀드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투자 대상과 방식 모두 넓힐 수 있게 된 셈이다.
첫 벤처투자조합의 투자 분야로 방산·공급망을 택한 데는 수은이 기존 수출금융을 통해 관련 산업과 접점을 넓혀온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수은은 국내 유일 완제기 제작사인 KAI의 최대주주인 동시에 국내 방산기업의 해외 수주 과정에서 금융을 공급해왔다. 체계기업부터 중소·중견 협력사까지 이어지는 방산 공급망의 구조와 자금 수요를 지속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방산과 공급망 산업은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데다 국가 안보와 경제안보에 직결돼 정책금융의 역할이 큰 분야로 꼽힌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벤처펀드가 기존 방산금융과 결합해 ‘기업 발굴→공급망 편입→해외진출’로 이어지는 금융지원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펀드 투자기업이 향후 주요 체계기업의 공급망에 진입하면 협력사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고, 자체 수출에 나설 경우 수은의 기존 수출금융을 활용할 여지도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 수은은 지난 4월 KAI 등 방산 5사와 ‘방산 상생 생태계 구축 및 해외진출 활성화를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하며 협력사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방산 5사가 대규모 수출사업에 참여하는 협력사의 납품실적을 확인하면 수은이 해당 중소·중견기업의 대출금리를 최대 1.2%포인트 낮추고 대출한도도 최대 20% 확대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성장단계 기업을 발굴하는 이번 벤처펀드가 더해지면서 벤처투자부터 방산 공급망 진입, 협력사 금융, 해외진출까지 기업의 성장단계에 맞춰 정책금융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지역금융과의 연계도 이번 펀드의 또 다른 축이다. 이번 출자는 수은과 BNK부산은행·BNK경남은행이 지난 4월 체결한 ‘지역 특화 생산적 금융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의 후속 사업으로 추진됐다. 당시 세 기관은 지역 산업 경쟁력 강화와 중소기업 금융지원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BNK부산은행과 BNK경남은행이 각각 100억원을 출자하면서 협력 범위를 벤처투자로 넓혔다.
수은의 해외진출 금융 경험에 BNK금융그룹의 동남권 영업망과 지역 산업에 대한 이해를 결합하면 지역 기업 발굴부터 해외진출까지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 여기에 공급망안정화기금의 정책 목적과 모태펀드·민간 운용사의 기업 발굴 역량을 더해 지역 균형발전과 전략산업 육성 효과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수은 관계자는 "모태펀드와 민간 운용사의 유망 벤처기업 발굴 역량을 활용코자 첫 LP 출자를 결정했다"며 "펀드 투자 이후 해당 기업이 글로벌 진출 단계로 성장하면, 수은의 대출·보증·직접투자 등 전방위적인 후속 패키지 금융을 연계해 지역 벤처기업의 스케일업(Scale-up)을 뒷받침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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