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권재윤 기자]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세우고 고(故) 신영자 롯데재단 전 의장이 이어온 롯데재단. 3대째 재단을 이끌고 있는 장혜선 이사장에게 두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치가 무엇인지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저를 그냥 손녀로 대했어요. 엄마도 저를 그냥 딸로 대했고요. 사업적인 걸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막상 제가 재단 일을 해보니 두 분과 닮은 점도 있더라고요."
롯데재단에는 요즘 장 이사장의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 선대의 방식을 그대로 잇기보다 직접 현장을 누비며 지원 대상과 방식을 세분화하고 새로운 사업을 더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히려 신 명예회장과 신 전 의장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와 자신의 방식이 맞닿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장 이사장은 신 명예회장의 외손녀이자 신 전 의장의 장녀다. 신 명예회장이 생전 가장 자주 만났던 손녀로 알려졌지만, 정작 롯데그룹 경영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별다른 그룹 활동 없이 지내던 그가 '롯데' 이름을 걸고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 건 2023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부터다.
장 이사장은 이달 20일 '2026 신격호 롯데 한마음 소통캠프' 현장에서 딜사이트와 만나 "정말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할아버지와 엄마, 저까지 이어져 온 재단의 철학"이라며 "저는 그 큰 방향을 이어가면서도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살펴 지원 대상과 방식을 세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건 '현장'이다. 신 명예회장은 생전 임직원이나 계열사 대표에게 "거기 가 봤나?"라고 물을 만큼 현장 확인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장 이사장 역시 취임 이후 외부 기관에 사업을 맡기기보다 수혜자를 직접 만나 필요한 지원을 찾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정 밖 청소년 지원 사업이다. 지금은 가장 애착을 갖는 사업 중 하나지만 처음엔 오히려 사업비를 줄이려 했다. '집을 나간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지원해야 하나'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들의 사정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부모의 폭력이나 성폭력 등을 피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이사장은 "누구보다 부모의 손이 필요한 나이인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친구들이었다"며 "그런 상황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공부를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돌봐야 할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원 규모도 초기 1억원에서 현재 2억원으로 두 배 늘렸다. 그는 "부모가 없더라도 '내 뒤에는 롯데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단을 맡은 뒤로는 신 명예회장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과거엔 성공한 기업가라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냉정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평전을 준비하며 그 이면을 새롭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장 이사장은 "할아버지는 오히려 서로 윈윈하자는 생각이 컸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서운 분처럼 보였지만 그 뒤에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평전을 준비하면서 더 존경하고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장학생을 대하는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이날 캠프 현장에서도 장 이사장은 장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소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단순히 장학금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어떤 생각과 고민을 갖고 있는지 직접 듣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예상 밖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이 오히려 어려운 가정환경과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주눅 들거나 이를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장학생들에게 종종 "우리가 너네 빽이야"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 이사장은 "그런 이유로 이들이 가진 장점이 가려지는 게 속상했다"며 "너희가 충분히 잘난 사람들이고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갈 사람들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변화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과거 캠프에 참여했던 한 장학생은 이후 사회공헌 분야에 관심을 갖게 돼 롯데재단에 입사했다. 장학금을 받던 학생이 이제는 재단 직원이 돼 후배 장학생을 돕고 있는 셈이다.
장 이사장은 이런 인연이 장학금 지급과 함께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10년, 20년 뒤에도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며 "유명한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보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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