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게임사와 중견·중소 게임사 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국내 게임산업의 '허리층'인 중견 게임사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개발비와 마케팅 비용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일부 기업은 구조조정과 사업 축소에 나서는 등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는 모습이다. 이에 딜사이트는 중견 게임사들이 자체 개발, IP 확장, 신사업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아울러 이들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과제와 제도적 지원 방안도 함께 짚어본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태민 기자] 펄어비스가 '붉은사막' 흥행으로 길었던 실적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시장의 관심은 벌써 차기작 '도깨비'로 향하고 있다. AAA(트리플A)급 게임 개발력을 입증했지만 신작 공백이 길어질 경우 다시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는 구조적 한계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붉은사막의 수명을 얼마나 연장하고, 차기작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느냐가 펄어비스의 중장기 기업가치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적 턴어라운드해도 차기작 출시 밀리면 다시 흔들
13일 업계에 따르면 붉은사막은 지난달 기준 글로벌 누적 판매량 600만장을 돌파했다. 이에 펄어비스는 지난 1분기 연결기준 매출 3285억원, 영업이익 2121억원을 기록하며 시장 기대치를 크게 웃도는 실적을 냈다. 증권가에서는 붉은사막이 연내 1000만장 안팎의 판매량을 달성하며 수천억원 규모의 매출을 추가로 견인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단일 타이틀 하나로 극적인 실적 턴어라운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문제는 신작 개발 속도와 출시 주기다. AAA 게임은 개발 기간이 길고 흥행 여부에 따라 실적 변동성이 크게 좌우되는 만큼, 후속작을 적절한 간격으로 내놓는 제품수명주기(PLC)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붉은사막 개발이 당초 계획보다 수차례 지연되면서 후속작 일정도 줄줄이 밀렸고, 그 과정에서 펄어비스는 긴 신작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검은사막’ 단일 IP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비용 부담도 지속적으로 커졌다. 실제 펄어비스의 최근 5년간 영업비용은 ▲2021년 3608억원 ▲2022년 3693억원 ▲2023년 3498억원 ▲2024년 3547억원 ▲2025년 380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인건비 비중은 평균 50% 수준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게임사는 매출이 감소해도 핵심 개발 인력과 연구개발(R&D) 조직을 쉽게 줄일 수 없는 구조인 만큼 신작 공백이 길어질수록 수익성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다.
증권가와 시장이 펄어비스의 후속 파이프라인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붉은사막이 초반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콘솔 패키지 게임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판매량은 자연스럽게 둔화한다. 후속작 개발이 지연되거나 흥행에 실패할 경우 다시 실적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넥스트 붉은사막' 확보가 최대 과제로 꼽힌다.
'붉은사막' 이후 신작 공백 2년 예상…세계관 확장으로 PLC 늘리기
펄어비스는 최근 1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과 주주간담회를 통해 차기작 로드맵을 구체화했다. 내부적으로 신작 출시 주기를 2~3년 단위로 설정했으며, 지난 3월 붉은사막 출시 직후 차기작 '도깨비(DokeV)'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도깨비는 2028년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주요 콘텐츠와 시스템을 구축하며 핵심 플레이 경험을 구체화하는 단계다. 펄어비스는 "붉은사막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차기작 '플랜8'은 그 이후로 가닥을 잡았다.
펄어비스는 최소 2년 동안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신작 공백기를 붉은사막의 라이프사이클 극대화로 넘긴다는 전략이다. 스토리 확장팩(DLC)을 순차적으로 선보이고, 멀티플레이 모드와 플랫폼 다각화를 통해 PLC를 최대한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캐시카우인 검은사막의 라이브 서비스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차기작 개발에 집중하기 위한 정리 작업도 병행했다. 펄어비스는 지난달 아이슬란드 자회사 CCP게임즈 지분 전량을 약 1771억원에 매각했다. 2018년 글로벌 IP 확보를 목표로 약 2500억원에 인수했지만 후속작 부진으로 6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탓이다.
펄어비스는 CCP 매각으로 확보한 현금성 자산을 신작 개발과 주주환원, 인수합병(M&A) 기회 모색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비핵심 자산을 정리하고 자체 IP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CCP를 통해 추진했던 글로벌 IP 확장 전략이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향후 성장성은 자체 개발작 성과에 더욱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개발 밀리는 동안 시장 경쟁 가열…‘도깨비’ 기획·서사 차별화 중요
결국 차기 파이프라인의 선봉장 역할을 맡은 도깨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게임성과 스토리라인 측면에서 어떤 차별성을 보여주느냐가 흥행의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초기 콘셉트의 신선함만으로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2019년 첫 공개 당시 도깨비는 전통 설화와 현대 한국 사회를 결합한 세계관, 메타버스 요소 등을 앞세워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개발이 지연되는 사이 산업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메타버스 열기는 식었고 이용자들의 콘텐츠 눈높이는 한층 높아졌다.
무엇보다 한국적 소재를 활용한 게임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한국적 세계관' 자체가 더 이상 독점적 경쟁력이 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됐다. 위메이드맥스의 '프로젝트 탈(TAL)'과 넥슨게임즈의 '우치 더 웨이페어러' 등도 한국 전통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도깨비가 펄어비스의 기획력과 서사 역량을 동시에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수집형 오픈월드 특유의 방대한 탐험 구조와 수집·육성 요소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할지, 현대 한국 사회와 전통 설화가 교차하는 세계관을 글로벌 이용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할지가 관건이라는 분석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 이후 한국적 세계관이 글로벌 흥행 코드로 주목받고 있지만, 이제는 소재 자체보다 이를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현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며 “향후 개발 방향성이 조정될 여지는 남아 있지만, 초기 기획안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만큼 산업 트렌드와 기술 역량을 어떻게 녹여낼지가 완성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펄어비스의 과제는 붉은사막의 흥행을 일회성 성공에 그치지 않고 연속 흥행 체계로 연결하는 데 있다는 평가다. 붉은사막으로 AAA 개발력을 입증한 만큼 이제는 도깨비와 플랜8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안정적으로 가동해야 한다. 업계에서는 펄어비스가 '넥스트 붉은사막'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국내 콘솔 게임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