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사이트 이진철 편집국장] '남의 떡이 커 보인다.'
기업이 딴눈 팔지 않고 자기 전공만을 오랜기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가 고도성장기를 구가하던 과거에는 전공이 아니더라도 일단 말뚝을 박고 사업을 확장하는 게 이른바 '재벌'로 성장하는 경영전략이었다. 실제로 삼성·현대 등은 창업주의 공격적인 사업확장 전략이 굴지의 그룹사로 성공한 배경이 됐다.
하지만 IMF외환위기와 대우그룹 해체를 겪으면서 자신의 특기와 무관한 무분별한 문어발 확장에 나섰던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구조조정 1순위에 올랐다. 초기에 큰 돈이 들어가긴 해도 한번 공장을 짓고 발을 들어놓으면 안정적으로 돈벌이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닥치자 허약체질이 바로 드러나고 그룹 전체를 휘청하게 만들었다. 삼성의 자동차, LG의 반도체는 수조원의 투자에도 애물단지로 전락해 정부 주도의 '빅딜'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핵심 역량에 대한 집중화로 '한우물 경영'에 나서는 게 우리 대기업들의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한동안 인식됐다.
21세기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산업 패러다임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면서 '문어발 확장'은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로 간판이 바꼈다. 인터넷 기반의 공룡기업이 새롭게 등장하고, 반도체, AI(인공지능), 전기차 등 융합기술발전에 따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칫 한우물만 파다간 도태되고 신사업을 적극 모색해야 미래 생존을 담보할 수 있어서다.
대기업집단 규제에 팔을 걷어붙였던 정부도 '대기업 계열사 확대=문어발 확장'이라는 인식에서 달라졌다.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합병(M&A) 활성화가 기술혁신과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위해서는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삼성과 현대차는 전자와 자동차를 넘어 바이오, 로봇 등 미래 신사업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SK는 가장 적극적으로 사업확장에 나선 대기업으로 꼽힌다. 일찍이 지주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개편해 사업회사와 투자회사가 M&A와 투자에 나서면서 계열사 숫자만 219개에 달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름만 들어서는 뭐 하는 회사인지 알 수 없는 회사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회사 안팎에서 나왔다. 결국 SK는 계열사 219곳 중 일부를 과감히 매각하거나 합병하는 조직 리밸런싱(구조조정)에 나서기로 했다. 그 배경에는 미래 성장동력으로 배터리 사업을 하는 SK온 살리기가 핵심이다.
자동차 배터리사업의 여건은 녹록치 않다. 국내 기업으로는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등 쟁쟁한 경쟁자가 있고 중국 업체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앞으로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의 투자비를 들여야 하는 부담을 어떻게 할 지, SK온을 비롯한 배터리 업체들의 공통적 고민이다. 누군가는 과거 삼성의 자동차, LG의 반도체 사업처럼 천문학적 투자비만 쓰고 결국 빈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SK가 SK온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만년 적자기업이었던 '미운오리' SK하이닉스를 '백조'로 날게 한 성공 경험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 글로벌 1위로 그간 인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SK그룹의 대대적인 사업 리밸런싱을 보며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고 있는 AI, 반도체, 전기차 관련 사업을 3년, 10년 후 누가 주도하고 있을 지 상상해본다. '남의 떡이 커보여' 진출했던 분야에서 대기업들이 호된 곤욕을 치른 역사는 되풀이 될 것인가. SK에 이어 어느 대기업이 후속 타자로 '어떤 선택과 집중' 리밸런싱에 나설 지 귀추가 주목된다.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