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를 살지만, 욕망은 항상 과거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영역을 넘보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동네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낯선 여행지에서 머물 곳을 찾으며, 조금 더 편리한 일상을 꿈꾼다.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의외로 오래된 것들에 머문다. 시간을 아끼고, 비용을 줄이고,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기업들은 이 바람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했다. 당근은 이웃을 다시 연결했고, 쿠팡은 기다림의 시간을 줄였으며, 야놀자는 여행과 숙박의 문턱을 낮췄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먼저 자본을 건넨 벤처캐피탈(VC)이 있다. '라이프체인저(Life Changer)'를 통해 삶을 바꾼 기업들과 미래에 투자한 자본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혁신의 출발점부터 성장의 명암, 지속 가능한 기업가치의 조건을 짚는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이준우 기자] 한국 남자의 패션은 무신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과거 패션 기업은 옷을 팔았지만, 무신사는 취향을 팔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멋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바꿔놓았다.
무신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패션은 아는 사람들만의 세계였다. 무신사는 그 세계의 문턱을 낮췄다. 옷을 잘 모르는 남자도 앱을 켜면 유행을 따라가게 했다. 무신사가 바꾼 것은 옷을 파는 방식만이 아니다. 유행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질서 자체다. 작은 신발 커뮤니티에서 출발한 무신사는 이제 성수동을 거점으로 패션을 넘어 뷰티와 글로벌 시장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그 성장의 변곡점마다 벤처캐피탈의 자본과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온라인 편집숍 무신사에서 고객들은 여러 매장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안방에 누워 앱 하나로 그날의 모든 쇼핑을 마친다. 남자들이 무신사에 중독돼 패션 센스가 업계 평균치까지 오르고 '무신사 냄새'를 걱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일상에 자리 잡은 무신사는 하나의 현상으로써 문화를 선도한다.
무신사는 2001년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프리챌에서 무지하게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2015년 자체 마케팅 채널을 확보하며 수익 구조를 확립한 무신사는 기관투자가들의 지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벤처캐피탈(VC)들이 이 기업을 투자 업계로 이끌어 사업 확장의 교두보를 마련해 줬는데 투자 재원을 마련한 무신사는 성수동 왕국을 건설하고 뷰티 업계 정복과 글로벌 진출을 꿈꾸며 기업공개(IPO) 몸값으로 10조원을 노리고 있다.
VC 업계에서 가장 먼저 무신사를 발굴한 주인공은 위벤처스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김소희 상무다. 1981년생인 김 상무는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를 졸업하고 실리콘 제조회사 창업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삼성전자·LG전자 등 산업계를 거쳐 2015년 LB인베스트먼트에 심사역으로 합류하며 벤처투자 업계에 첫 발을 들였다. 그리고 3년 후 VC 중 처음으로 무신사에 34억원을 투자했다.
무신사를 투자 업계로 끌어오는 과정은 그의 성공한 커리어 만큼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2015년 조만호 무신사 대표를 처음 만났지만 브랜드 마케팅 채널로 매출이 폭발하기 시작한 무신사는 투자 니즈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 대표와 무신사의 성장 플랜을 함께 고민하며 맨땅의 헤딩으로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2018년 첫 투자를 끌어 낼 수 있었다. 당시 두 기관이 합의한 무신사의 기업가치는 2300억원 수준으로 전해졌다.
이후 VC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김소희 상무는 구주를 신동원 DSC인베스트먼트 상무에게 소개하며 무신사의 외부 투자 유치를 적극 도왔다. DSC가 지분을 취득했을 때 평가된 밸류에이션은 약 4000억원 수준으로 신 상무도 무신사에 상당한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무신사에 가장 큰 애정을 쏟는 재무적투자자(FI)는 1600억원 이상을 투자한 IMM인베스트먼트다. 윤원기 IMM 부사장은 2019년 신 상무의 소개로 구주를 매입하며 무신사의 매력에 빠졌다. 그룹 자산운용 법인 매니아원의 몫을 더해 IMM이 보유한 무신사의 전체 지분 약 11%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부사장은 현재 기타비상무이사로 무신사에 겸직하며 성공적인 IPO를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3명의 MZ세대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이 무신사를 데카콘 수준으로 육성한 것이다.
무신사는 투자 라운드를 거듭하며 몸집이 급속도로 커졌다. 2019년 1900억원 규모의 시리즈A를 진행해 세쿼이아캐피탈로부터 기업가치 2조원을 인정받았다. 2021년 시리즈B에서는 IMM과 세쿼이아 등이 1300억원을 투자하며 2조원 중반의 밸류가 평가됐다. 2023년에는 IMM,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웰링턴매니지먼트, 한국산업은행 등이 시리즈C 라운드에 참여하며 2400억원을 투입했고 기업가치가 3조원을 돌파했다. 현재 시장에서 거론되는 밸류는 10조원 이상으로 내년 코스피 IPO 대어로 떠올랐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을 정복한 무신사는 다음 스텝으로 브랜드화와 부동산 재벌을 꿈꾸고 있다. 자체 브랜드(PB) 무신사 스탠다드와 여러 뷰티 용품들을 론칭해 유니클로와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고 호황 산업으로 지목된 K-뷰티 시류에 편승하겠다는 전략이다. 쿠팡에서 시작된 무신사 냄새라는 양산형 브랜드 유통망 오명을 지우고 브랜드화를 통해 글로벌 유통 공룡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주요 상권으로 자리매김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에 건물을 잇달아 올린 데 이어 CJ올리브영과의 성수역 역명 경쟁에서도 종지부를 찍으며 성수동을 무신사 왕국으로 만들었다. 10조 무신사의 다음 성장성에 성공으로 베팅한 FI들 사이에서 기대 몸값이 15조원이 거론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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