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를 살지만, 욕망은 항상 과거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영역을 넘보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동네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낯선 여행지에서 머물 곳을 찾으며, 조금 더 편리한 일상을 꿈꾼다.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의외로 오래된 것들에 머문다. 시간을 아끼고, 비용을 줄이고,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기업들은 이 바람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했다. 당근은 이웃을 다시 연결했고, 쿠팡은 기다림의 시간을 줄였으며, 야놀자는 여행과 숙박의 문턱을 낮췄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먼저 자본을 건넨 벤처캐피탈(VC)이 있다. '라이프체인저(Life Changer)'를 통해 삶을 바꾼 기업들과 미래에 투자한 자본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혁신의 출발점부터 성장의 명암, 지속 가능한 기업가치의 조건을 짚는다. <편집자주>
[딜사이트 김기령 기자] 몇 년 간 스마트워치를 차 오던 30대 여성 A씨는 최근 아날로그 병이 도졌다. 재깍재깍 돌아가는 쿼츠와 오토매틱 시계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눈은 저세상 너머 스위스 오토매틱에 홀려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일제 15만원짜리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런데도 왠지 사고나면 서랍에 처박아둘 것만 같은 불안함에 며칠을 망설였다.
일주일 동안 눈팅만 하다가 갑자기 당근이 떠올랐다. 누군가 나처럼 현질(?)을 했다가 구석에 있던 것을 당근에 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두근거리며 앱을 켜보니 역시나! 새 것처럼 깨끗한 3만원짜리를 강원도 동해시에서 발견했다. 지난해였다면 기름값이나 차비 때문에 꿈도 못꿨을테지만 아싸라비아~ 당근페이가 생겼다. 5000원 배송비만 내면 당근에서 포장과 운반, 안심결제를 도와준단다.
‘바로구매’로 결제해 집 앞으로 배송받아보니 판매자 설명 그대로다. 일제 시계 감성의 무브먼트 소리가 사각거리는 듯이 심장의 맥박과 장단을 맞추는 것만 같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판매자에게 한껏 칭찬하는 후기를 써주고는, 기존 결제한 금액의 판매자 이체를 승인한다.
당근은 창업 초기 거래 범위를 가까운 동네로 제한하고 주민들이 직접 만나 물건을 확인하도록 한 것이 차별화와 대형화를 이끈 전략으로 주효했다. 거래자들의 익명성을 어느 정도 배제하고 택배 거래의 불신을 줄여 사기거래를 억지하려던 의도가 먹힌 것이다.
판교에서 서비스 지역을 넓혀가던 창업팀은 2016년 전국 단위 서비스로 키우기 위해 투자 유치에 나섰고 캡스톤파트너스가 그 가능성을 먼저 알아봤다. 당시 투자를 검토한 오종욱 이사는 중고나라와 당근 이용자의 접속 행태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중고나라 이용자가 살 물건을 정해 앱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면 당근 이용자는 쇼핑하듯 앱을 둘러봤다. 당시 일부 이용자들은 한 달 중 24일 앱에 접속하고 한 번 들어오면 20분가량 머물렀다. 거래할 물건을 정하지 않았더라도 앱을 찾는 이용 행태에서 당근의 확장 가능성을 봤다. 이른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당근 중독증이다.
캡스톤파트너스는 2016년 12월 당근에 5억원을 투자했다. 케이큐브벤처스와 스트롱벤처스도 초기 투자자로 참여해 세 곳이 총 13억원을 투자했다. 당근은 이 자금을 서비스 확장과 사업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 당근은 이후 전국으로 이용자를 넓히고 지역 광고와 커뮤니티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2018년 시리즈B에서는 소프트뱅크벤처스와 카카오벤처스가 새 투자자로 합류했고 캡스톤파트너스와 스트롱벤처스도 후속 투자했다. 2019년 시리즈C에서는 알토스벤처스와 굿워터캐피탈이 주도해 400억원을 투자했고 기존 투자자들도 합류했다. 2021년 시리즈D 라운드에는 굿워터캐피탈·SBVA·알토스벤처스·카카오벤처스·스트롱벤처스·캡스톤파트너스 등이 후속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당근은 시리즈D에서 1789억원을 조달하며 기업가치 3조원을 인정받았다.
이용자 수요에 맞춰 거래 방식도 넓어졌다. 지난해 9월 도입된 ‘바로구매’를 이용하면 앱에서 결제하고 택배로 물건을 받을 수 있다. 당근페이 안심결제가 적용돼 구매자가 물건을 받은 뒤 구매를 확정해야 판매대금이 정산된다. 올해는 바로구매 상품 거래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당근에 따르면 바로구매 거래 완료 건수는 도입 초기보다 약 90배 증가했다.
지난 10일에는 설립 이래 처음으로 당근절 행사를 열고 바로구매 상품의 배송비를 1인당 최대 5회 지원했다. 행사 당일 중고거래 건수는 평소 토요일 대비 141% 늘었고 구매자와 판매자 수도 각각 72%, 85% 증가했다. 당근은 당근절을 매년 열고 우리나라 대표적인 중고거래 행사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판매 과정에도 편의 기능을 더했다. 사진을 찍으면 AI가 물건의 예상 판매가를 제안하고 상품명과 설명을 작성해준다. 여러 물건의 사진을 한 번에 올리면 품목별 게시글을 만들어주는 기능도 선보였다. 물건을 내놓을 때 가격을 정하고 판매글을 쓰는 수고를 덜어 거래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다.
당근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2707억원, 영업이익은 146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당근을 통한 중고거래로 이뤄진 이웃 간 연결 건수는 1억9000만건으로 집계됐다.
당근의 기업가치는 지난달 완료된 구주 거래에서 2조7000억원 안팎으로 추산됐다. 2021년 시리즈D 투자 당시 인정받은 3조원에 가까운 가치보다는 낮지만 2025년 연결 매출의 약 10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당근의 기업가치를 단순한 거래 규모나 실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게 투자자들의 시각이다. 최근 당근 구주를 인수한 TS인베스트먼트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혁신 스타트업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삶의 편의를 개선하는 플랫폼 기업들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며 “이들 플랫폼이 한때 주목받다가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삶은 여전히 그 서비스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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