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구예림 기자] 김성식 예금보험공사 사장이 취임 첫해부터 금융안정계정 입법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취임 당시 ‘도입 마무리’를 주요 과제로 내걸고 창립 30주년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힘을 실었지만, 관련 법안은 올해 세 차례 국회 법안소위 안건에 오르고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마지막 상정 이후 넉 달 넘게 논의가 멈춘 데다 다음 소위 일정조차 잡히지 않으면서 김 사장이 취임 첫해 제도 도입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졌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김 사장은 지난 1월7일 취임사에서 선제적 위기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과제로 금융안정계정 도입 마무리를 제시했다. 지난 6월1일 창립 30주년 기념사에서도 금융안정계정과 신속정리제도를 두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강조하며 조속한 입법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금융안정계정은 시장의 급격한 변동으로 정상적으로 영업하던 금융회사들이 일시적인 유동성·자본 부족에 빠질 경우 부실화하기 전에 자금을 공급하는 장치다. 예금보험기금 안에 별도 계정을 두고 채무보증·대출 등 유동성 공급과 자본확충을 통해 금융회사 부실과 시장 불안의 확산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현재 예금보험제도가 부실 금융회사에 대한 예금대지급과 정리 등 사후 대응에 무게가 실려 있는 만큼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상 금융회사의 일시적인 자금난에 대응할 별도의 안전판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특히 2022년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이 급격히 경색됐고 이듬해(2023년) 새마을금고의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이 개별 금융회사나 업권의 유동성 문제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는 경계감도 커졌다. 금융회사가 실제 부실에 빠진 뒤 개입하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위기 확산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안정계정의 구체적인 법제화는 2022년 금융위원회가 도입안을 내놓으면서 본격화됐다. 그해 7월 도입안 발표에 이어 12월에는 예금자보호법 개정 정부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정부안은 금융위가 기획재정부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관계기관의 의견을 들은 뒤 예보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고, 예보의 심사와 예금보험위원회 의결을 거쳐 지원 여부와 규모를 결정하도록 설계됐다. 금융회사가 부실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공적 성격의 기금을 투입하는 만큼 지원 필요성과 회수 가능성을 여러 단계에서 따져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21대 국회(2020~2024년)에서는 금융안정계정의 발동 요건과 의사결정 구조 등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정상 영업 중인 금융회사에 자금을 공급하는 제도인 만큼 어떤 상황에서 계정을 가동할지 기준을 보다 구체화하고, 금융위뿐 아니라 관계기관의 참여를 어느 수준까지 보장할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도덕적 해이와 예금보험기금의 건전성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부실화 이전에도 지원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면 금융회사가 자체적으로 유동성과 자본건전성을 관리할 유인이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안정계정이 다른 예금보험기금 계정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구조인 만큼 지원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경우 기존 예보기금의 건전성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결국 정부가 2022년부터 추진한 금융안정계정은 21대 국회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관련 개정안은 2024년 5월29일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입법의 공은 22대 국회로 넘어갔다. 같은 해 7월11일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8월16일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여야 의원이 각각 법안을 내면서 입법 불씨는 살아났지만 속도는 좀처럼 붙지 않고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두 법안은 올해 3월31일과 4월2일, 5월12일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의결되지 않았다. 마지막 소위 상정은 5월12일로 이후 넉 달 넘게 후속 심사가 멈춰 있다.
21대 국회에서 불거졌던 제도 설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도 아니다. 금융안정계정 가동 과정에서 관계기관의 의견을 어떻게 반영할지, 지원 요건과 손실 부담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지 등이 여전히 입법 과정에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2022년 첫 정부안이 나온 지 4년째지만 선제적 자금지원에 따른 도덕적 해이와 기금 건전성을 둘러싼 우려를 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위는 지난 7월 하반기 업무보고에 금융안정계정 신설과 신속정리제도 도입을 포함하며 추진 방침을 재확인했다. 김 사장 역시 취임 이후 제도 도입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입법의 열쇠는 국회가 쥐고 있다.
올해 정기국회는 오는 12월9일까지다. 이후 임시국회를 통한 법안 처리 가능성도 열려 있다. 정기국회 종료까지 두 달여가 남았지만 법안소위 심사조차 재개되지 않으면서 연내 처리 여부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김 사장으로서는 금융당국과 함께 지원 요건과 의사결정 구조, 기금 운용을 둘러싼 국회의 우려를 해소해 멈춰선 입법 논의에 다시 동력을 붙이는 게 과제로 남았다.
예보 관계자는 “금융안정계정 도입과 관련한 국회 심사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선 소위 일정이 정해진 뒤 해당 법안이 논의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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