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승연 기자] 국내 상장사를 대상으로 주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정한 공개매수가 진행될 경우, 이사회가 의견과 판단 근거를 밝히도록 하는 이른바 ‘한국형 베어허그(K-Bear Hug)법’ 도입이 추진된다. 제도가 시행되면 저평가된 상장사를 중심으로 외부 인수 제안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경영진의 주가 부양 및 기업가치 제고 노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일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형 베어허그법으로 불리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베어허그는 M&A 전략 가운데 하나다. 인수 시도자가 대상 기업에 사전 예고 없이 현재 시장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공개적인 매수 제안을 내놓고 경영진과 이사회를 압박하는 방식이다.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을 앞세워 이사회뿐 아니라 주주와 시장의 압력까지 끌어낸다는 점에서 곰이 상대를 강하게 끌어안는 모습에 빗대 이름이 붙었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일정한 공개매수에 대한 이사회의 의견표명을 의무화하는 데 있다. 개정안은 주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정한 공개매수의 경우 이사회가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판단 절차를 거쳐 공개매수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공개매수에 대한 의견표명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1억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조항도 신설한다. 법안이 통과될 경우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날부터 시행된다.
현행 자본시장법에서는 공개매수 대상 회사가 해당 공개매수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의무는 아니다. 이에 따라 이사회가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주주들은 해당 공개매수에 대한 이사회의 판단과 근거를 충분히 확인하기 어렵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공개매수 대상 회사가 공개매수 개시 이후 일정 기간 내 수용이나 거절, 중립 등의 입장과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영국 역시 피인수 회사 이사회가 공개매수에 대한 의견과 판단 근거를 주주에게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도 인수 제안을 검토하는 이사회의 행동 기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다. 구체성과 목적의 합리성, 실현 가능성을 갖춘 인수 제안을 성실하게 검토해야한다는 내용이다.
한화투자증권은 8일 발간한 ‘문 앞의 야생곰들’ 보고서에서 한국형 베어허그 제도가 도입될 경우 국내 M&A 시장의 외부 견제 기능이 강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시장에서 저평가된 기업일수록 인수 대상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존 경영진과 이사회, 대주주가 기업가치 제고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인수 제안이 시장에 공개되고 이사회가 판단 근거까지 설명해야 하는 만큼 경영진이 제안을 자의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일반 소액주주 역시 제안 조건을 확인하고 보유 주식을 프리미엄이 반영된 가격에 매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DS투자증권도 8일 발간한 ‘베어허그(Bear Hug) 법안 발의’ 보고서에서 인수 제안 자체가 저평가 기업의 재평가를 촉발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이사회가 제안 가격이 기업의 적정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절한다면 이후 스스로 주장한 기업가치를 시장에 입증해야 하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압력이 주주환원 확대뿐 아니라 경영진 교체, 자산 매각, 비핵심 사업 정리 등 사업 구조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시했다.
인수 제안을 거절한 뒤 기업가치 제고에 나선 사례로는 일본 세븐앤아이홀딩스(Seven & i Holdings)가 있다. 세븐앤아이홀딩스는 2024년 8월 캐나다 편의점 업체 알리멘타시옹 쿠시타르(Alimentation Couche-Tard)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기업가치를 과소평가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세븐앤아이는 이후 사업 구조 개편과 대규모 주주환원 계획을 추진했으며 2025년부터 2030년까지 누적 2조엔 규모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내놨다. 2025회계연도에는 이 가운데 6000억엔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완료했다.
제도 도입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경영권 방어 장치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장사가 외부 인수 위협에 과도하게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인수 의사나 자금 조달 능력이 없는 세력이 허위 제안을 통해 주가를 띄우는 방식으로 시세를 교란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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