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태은 기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향후 5년치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하며 전력망 투자 재원 확보에 나섰다. 급증하는 송·변전망 투자 수요에 산업용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 시행으로 수익 감소 우려가 커지면서 새로운 자금 조달 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한전에 따르면 전기요금 선납 참여 여부와 방식, 선납 규모, 선납 기간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앞서 한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향후 5년치 전기요금 약 25조원을 미리 납부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해당 금액은 양사가 지난해 납부한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2027~2031년 사용 전력량을 가정해 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납제가 검토되는 배경에는 급증하는 전력망 투자 수요가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호남권 산업단지 등은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만큼 신규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재원 마련이다. 한전은 2038년까지 72조8000억원 규모의 송·변전망 투자를 추진해야 하지만 재무 여력은 충분하지 않다. 한전의 총부채는 올해 6월 말 기준 210조7161억원에 달한다. 반기 기준 이자비용이 2조791억원에 달해 단순 계산으로도 매일 110억 원이 넘는 돈이 이자로 증발하는 구조다.
여기에 정부가 추진 중인 산업용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도 한전의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와 한전이 공개한 설계안에 따르면 비수도권 산업용 전기요금은 최대 10% 인하된다. 이에 한전의 전기 판매 수입은 연간 2조8000억~3조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발전사 전력구입비를 낮춰 수익 감소분을 보전한다는 방침이지만 업계에서는 발전업계 반발 가능성이 큰 만큼 결국 한전이 부담을 떠안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력망 투자 확대가 필요한 시점에 차등요금제까지 도입되면서 한전의 재원 조달 부담이 더욱 커진 것이다.
전력업계는 전기요금 선납제가 단기적으로는 한전의 자금 조달 부담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전의 제안대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선납에 참여할 경우 확보되는 25조원은 한전이 2038년까지 계획한 송·변전망 투자액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다만 선납금은 회계상 부채로 인식된다는 한계가 있다. 아직 전기를 공급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돈인 만큼 향후 전력 공급 의무가 수반되는 선수금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유동성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부상 부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 만큼 근본적인 재무구조 개선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선납은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방안"이라며 "(한전의 재무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한전이 채권 발행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송·변전망 투자 재원을 확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전력망 투자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전기요금 현실화 논의도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한 전문가는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이 주요국과 비교해 낮은 수준인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전기요금 인상이 근본적인 해법일 수 있지만 산업계 부담이 큰 만큼 정부가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카드"라고 말했다.
한편 선납제가 다른 대규모 전력 소비 기업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산업계에서 전력 사용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기업인 만큼 비슷한 규모의 선납을 기대할 수 있는 기업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큼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기업은 사실상 없다"며 "이번 방안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따른 막대한 전력 수요와 두 기업의 전력 사용 규모를 고려한 특수한 사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한전 관계자는 "첨단산업 전력망 투자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요금 조정과 사채 발행 외에 새로운 자금 조달 수단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전기요금 선납제는 전력망 확충이 시급한 기업과 투자 재원이 필요한 한전의 수요를 연결하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전은 대규모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참여 기업은 안정적인 투자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 제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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