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조은비 기자] 중국산 반제품(슬래브·빌릿)의 국내 수입이 1년 새 3배 넘게 늘었다. 후판·열연 등 완제품에 반덤핑 관세가 매겨지자 규제가 느슨한 반제품으로 저가 물량이 옮겨간 것이다. 특수강 봉강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면서, 완제품을 막으면 규제가 약한 옆 품목으로 갈아타는 우회 구조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철강협회 무역통계에 따르면 중국산 반제품의 국내 수입량은 2026년 상반기 32만5434t으로 전년 동기(9만6875t)의 3.4배로 늘었다. 슬래브가 9만6393t에서 25만4397t으로 163.9% 증가했고, 빌릿은 사실상 유입이 없던 482t에서 7만1037t으로 급증했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반제품은 국내에서 재압연을 거치면 결국 완제품이 된다"며 "완제품에 반덤핑을 매겨도 반제품으로 들여와 가공하면 관세를 피할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정부도 우회 가능성에 대응하고 있다. 2025년 1월 공급국 내에서 덤핑물품을 경미하게 변경하는 행위를 우회덤핑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도입한 데 이어, 그 적용 범위를 제3국·국내 보세구역 경유와 제3국 조립·완성까지 넓히는 관세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했다. 기획재정부는 개정 과정에서 철강을 주요 대상으로 명시했다.
반제품 수입이 늘어난 배경에는 완제품과의 규제 격차가 있다. 완제품은 각국의 관세·반덤핑 조사가 집중되며 가격이 눌리는 반면, 반제품은 수입국 안에서 재압연·가공을 거쳐 부가가치를 붙일 수 있어 거래가 유지된다. 중국 철강사로서는 무역장벽과 탄소규제를 피하는 우회로인 셈이다.
이런 흐름은 중국의 수출 구조 변화와도 맞물린다. 중국철강협회(CISA) 통계에 따르면 2025년 1~10월 중국의 반제품 수출은 1190만t으로 전년 동기의 2.6배로 늘었다. 2023년 330만t, 2024년 630만t과 비교하면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세계 시장으로 확대된 중국산 반제품이 국내 시장에서도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저가 물량의 두 번째 우회 경로는 특수강이다. 산업통상부 무역위원회는 지난 5월 7일 중국산 봉강(탄소강 제외 합금강)에 대한 덤핑 사실과 국내 산업 피해 유무 조사를 개시했다. 업계에서 통상 특수강봉강으로 불리는 이 제품은 자동차·방산·중장비·우주항공·원전 등 전략 산업에 쓰이는 고부가가치 소재다. 조사는 지난해 8월 세아베스틸과 세아창원특수강의 반덤핑 제소로 시작돼 올해 2월 27일 최종 신청을 거쳤고, 무역위는 9월 예비판정과 12월 공청회를 거쳐 2027년 2월 최종판정을 내릴 전망이다.
다만 특수강봉강은 반제품처럼 수입이 폭증한 경우는 아니다. 중국산 특수강봉강 수입량은 2026년 상반기 34만9798t으로 전년 동기(32만7159t)보다 6.9% 느는 데 그쳤다. 4월 수입이 전년 동월 대비 25.4% 급증한 뒤 5월엔 2.2% 감소하는 등 월별 등락도 크다. 그럼에도 조사가 시작된 것은, 저가 물량이 오랜 기간 꾸준히 유입되며 시장을 잠식해왔기 때문이다.
잠식의 양상은 실적에도 드러난다. 다만 그 방향은 단순하지 않다. 세아창원특수강의 연결 영업이익은 2024년 114억원에서 2025년 522억원으로 4.6배 늘었고, 2026년 1분기 영업이익도 138억원으로 전년 동기(122억원)보다 13.3% 증가했다. 실적만 보면 오히려 회복세다. 그러나 세아 측은 "2025년 실적은 2022년(1257억원)의 41.5% 수준에 그친다"며 중국산 저가 소재에 따른 피해가 이어져 왔다고 밝혔다. 실적이 급락하지 않았는데도 제소에 나선 것은, 당장의 손익보다 저가 물량의 중장기 잠식을 더 무겁게 봤기 때문이다.
세아 측은 봉강의 품질 리스크도 근거로 들었다. 세아 관계자는 "봉강은 소재의 균일함과 청정도가 중요하지만 외관상 품질 확인이 어렵다"며 "소규모 영세 업체 비중이 높은 부품·장비 산업은 조달 소재의 품질·이력 검증에 한계가 있어, 저가 중국산이 유입되면 공급망 전반으로 품질 리스크가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실제 피해 유무와 구체적 리스크는 무역위원회가 조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반제품과 특수강에서 나타나는 우회는 '규제-우회-재규제'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한 품목에 관세를 매기면 규제가 약한 옆 품목으로 물량이 옮겨가고, 국내 업체가 다시 제소로 대응하는 구조다. 무역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9일 기준 진행 중인 반덤핑 조사 7건은 모두 중국산이 포함됐고, 아연도금 냉연강판·H형강·봉강 등 철강 품목이 나란히 올랐다. 덤핑방지관세가 부과 중인 31건 가운데 21건(약 68%)도 중국을 대상으로 한다.
완제품에 세운 장벽은 반제품·특수강이라는 우회로를 남기고, 그 우회로를 막으면 또 다른 품목이 열린다. 저가 물량이 품목을 바꿔가며 유입되는 만큼, 개별 조사만으로는 이런 형태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아 측은 "반덤핑 관세 부과 등의 조치가 확정되면 무분별한 중국산 봉강 유입을 제한해 관련 산업과 이를 소재로 쓰는 부품·장비 산업의 품질 경쟁력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판매·수익 영향은 무역위 조사 결과와 조치에 근거해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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