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전한울 기자]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인 중국 춘추전국시대. 철천지 원수였던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자 서로 단합을 이뤄내 생사의 위기를 모면한다. 이 찰나의 순간은 이후 수많은 이들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 '오월동주'의 유래가 됐다.

수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사람 사는 얘기는 돌고 돌아 제 자리다. 수십세기 전의 '오월동주'는 현대 산업계에 그대로 재현된다. 인텔·AMD의 GPU 동맹과 포드·GM의 전기차 협력 논의까지 위기의식이 고조된 산업 다방면에서 적과의 동침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견인해 온 반도체 업계에서도 오월동주가 재현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 미완인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삼성전자와 한미반도체다.

과거 메모리반도체 핵심장비 교류를 이어온 양사는 2011년 한미반도체가 삼성전자 장비 장비계열사인 세메스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한 이후 수년간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서 교류를 크게 줄였다. 이처럼 앙숙으로까지 여겨졌던 양사가 최근 생존을 위한 재협력에 나설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먼저 손을 내민건 한미반도체로 알려졌다. 한미반도체가 과거 사례 반복을 우려하면서도 교류 재개 및 확대를 희망하는 의향을 삼성전자 측에 전달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앞서 SK하이닉스에 고대역폭메모리(HBM) 핵심장비인 'TC본더'를 독점 공급해왔으나 SK하이닉스가 최근 한화정밀기계 등으로 공급망 확장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한미반도체도 이에 맞는 대응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마침 삼성전자도 HBM 수율 확보에 애를 먹으면서 한미반도체의 손을 잡을 공산이 한층 커졌다. 한미반도체의 TC본더는 최근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크론에도 납품될 만큼 높은 기술력이 입증됐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실제 한미반도체 창업주인 곽노권 회장의 장례식에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빈소를 찾아 TC본더 수급과 관련한 일부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공급처를 확장하려는 한미반도체와 수율 증진을 노리는 삼성전자의 니즈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한미반도체가 최근 투자 중인 것으로 알려진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는다면 양사의 협력 가능성은 한층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TC본딩 이후의 차세대 기술로, 삼성전자가 시장 판도를 뒤집기 위해 점찍어둔 궁극의 기술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현재 네덜란드 베시 사(社)와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 및 장비 협력을 진행 중이나, 아직 온전한 '메모리향 하이브리드 본더'는 출시되지 않은 만큼 앞선 기술력을 쌓아온 한미반도체에게도 기회가 열려있는 셈이다.

이제 국내 산업계도 라이벌사와의 협력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초(超)협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삼성전자의 TV에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이 들어가는 점만 봐도 격제지감을 느낀다.

특히 최근 수익성이 크게 악화한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가 HBM 시장에서 반등을 이뤄내기 위해선 수 단계를 뛰어넘는 기술 도약이 시급한 상황인 만큼 기술력 부문을 최우선 기준으로 두고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한미반도체도 진정한 재회를 원한다면 양사 이해관계를 아우를 수 있는 수준에서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 생존 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 그깟 과거와 앙금이 무슨 소용이랴. 

친구(Friend)도 적(Enemy)도 될 수 없다면 프레너미(Frenemy)로서의 건강한 긴장관계도 나쁘지 않다. 생존을 위한 협력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