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한보라 기자] 삼성전자가 지난해 매출채권, ASML 지분 등 팔 수 있는 건 모두 팔아 현금을 확보한 덕에 평년 수준의 현금흐름을 유지했다. 다만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반도체 업황이 악화된 탓에 본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대폭 줄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는 미래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사가 투자를 줄이던 것과 달리 최근 5개년 중 가장 큰 규모의 자본적 투자(CAPEX)를 집행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은 연결기준 91조7718억원으로 전년 대비 20.05% 줄었다. 이 회사의 현금성자산이 100조원 밑으로 떨어진 건 2018년 이후 처음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 말 2024년 사업 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등에서 배당 감축 문제까지 거론할 정도로 고위 임원진 사이에서 반도체 불황에 따른 현금 고갈 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했었다"고 전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반도체 불황이다. 글로벌 경기 부진으로 만든 물건은 팔리는 대신 창고에 쌓이면서 현금은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해 연결 기준 영업활동현금흐름은 전년 대비 29.02% 줄어든 44조1374억원. 그렇다고 투자를 줄일 순 없었다. 같은 기간 CAPEX로 유출된 현금은 60조4241억으로 최근 5년 중 가장 많았다.

투자 규모는 삼성전자가 경기도 고덕신도시에 6개 공장(팹)으로 이뤄진 평택캠퍼스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급증했다. 이 회사는 약 870만평(287만6033㎡)  규모 평택캠퍼스에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팹을 아우른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허브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평택캠퍼스는 4, 5 공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DS부문 내부적으로 미국 테일러 팹 공사는 사실상 중단, 평택캠퍼스도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엿볼 수 있듯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선 상황"이라면서도 "올해 CAPEX 규모를 쉽사리 줄일 순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올해도 반도체 분야에 대규모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선제적으로 투자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자산 유동화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노광장비(EUV) 회사 ASML 지분 158만407주(0.4%)를 매각한 건이다. 연결기준 현금흐름표를 보면 지분 매각 등으로 유입된 현금은 6조5216억원에 달한다. 

단기차입금이 대폭 늘어난 이유는 전년 대비 증가한 매출채권 유동화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는 보유한 매출채권을 금융기관에 매각해 이자를 제외한 현금을 확보하는 매출채권 팩토링 규모를 전년 대비 85.19%나 늘렸는데, 해당 금액이 장부상 단기차입금으로 잡힌 까닭이다. 

한편 삼성전자가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차입한 유동성은 별도 재무제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삼성디스플레이 지분 84.8%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연결 장부에서는 각 회사의 유동성을 발라내 살펴보기 쉽지 않다. 

지난해 삼성전자 별도 현금흐름표를 살펴보면 사채 및 장기차입금으로 유입된 현금 규모는 21조9900억원에 달한다. 해외법인 등에 흩어진 현금은 자유롭게 운용하기 한계가 있는 만큼 국내에 보유한 현금 규모를 늘리기 위해 내부 차입을 실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별도 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 합계를 전년 대비 2배까지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