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승연 인턴기자] 아파트에 쌓인 178억원을 빼돌리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 도전하는 남자가 있다. JTBC 드라마 '아파트'의 주인공 박해강(지성 분)이다. 거액의 돈이 필요해진 그는 아파트 주민들이 오랜 기간 모아둔 장기수선충당금에 눈을 돌린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아파트가 노후화했을 때 필요한 수선비를 미리 마련하기 위해 적립하는 돈이다. 승강기 교체와 외벽 도색, 노후 배관 보수 등에 사용되며 매달 관리비 고지서에 포함돼 부과된다. 개인이 노후에 대비해 저축하듯 아파트도 미래의 유지·보수 비용을 준비하는 셈이다.
드라마 속 아파트에는 이 돈이 무려 178억원이나 쌓여 있다. 현실의 아파트에도 이처럼 거액의 장기수선충당금이 있을까.
◆한 단지에만 172억원…전국 아파트에 11조원
실제 국내 주요 대단지에도 수십억원에서 100억원이 넘는 장기수선충당금이 쌓여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파트는 약 9800세대 규모다. 서울 송파구 헬리오시티는 9510세대로 드라마와 비슷한 규모다. 국토교통부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K-apt) 연계 공개 자료에 따르면 2026년 9월 기준 헬리오시티의 장기수선충당금 잔액은 약 62억7550만원이다. 드라마 속 178억원의 약 35% 수준이다.
178억원에 가까운 장기수선충당금을 보유한 아파트는 없을까.
경기 수원시 장안구 수원한일타운아파트의 장기수선충당금 잔액은 같은 기간 약 172억371만원으로 집계됐다. 드라마 속 금액의 약 97%에 달하는 규모다.
흥미로운 점은 세대수가 9510세대인 헬리오시티보다 5282세대인 수원한일타운의 적립금 잔액이 약 109억3000만원 더 많다는 사실이다. 9월 기준 장기수선충당금 월부과액도 헬리오시티는 세대당 평균 약 9250원, 수원한일타운은 약 4만630원으로 4.4배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차이에는 단지별 건축 연한과 시설 구성, 장기수선계획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헬리오시티는 2018년, 수원한일타운은 1999년 준공돼 건축 연한에 약 19년의 차이가 있다. 과거 수선공사에 사용한 금액도 현재 잔액에 영향을 미친다.
세대별로 매달 납부하는 금액은 크지 않아 보여도 수십년간 쌓이면 상당한 규모가 된다. 지난달 7일 조인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전국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 적립액은 11조1680억원에 달했다.
◆마음대로 못 쓰는 돈인데…5년간 위반 3299건
그렇다면 드라마 속 박해강의 생각처럼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되면 이 거액의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회장 개인의 판단만으로 돈을 인출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르면 장기수선충당금은 원칙적으로 장기수선계획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관리주체가 장기수선계획을 바탕으로 사용계획서를 작성하고 입주자대표회의 의결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 장치가 자금의 안전성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5년까지 5년간 장기수선충당금 관련 위반 행위는 3299건 적발됐다. 횡령뿐 아니라 목적 외 사용과 적립 미이행 등을 포함한 수치다.
적립금을 정해진 용도와 다르게 사용한 사례가 833건이었고 적립 의무를 지키지 않은 사례도 414건에 달했다. 허위 회계처리는 60건, 횡령·유용은 2건이었다. 적발 이후 내려진 후속 조치 3283건 가운데 87.5%는 행정지도나 시정명령에 그쳤다.
실제 횡령 정황이 드러난 사례도 있다. 2020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서울시와 노원구의 회계감사 결과 약 10년간 장기수선충당금 9억9000만원이 횡령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가운데 3억4000만원이 경리 직원의 개인 계좌로 이체된 사실도 확인됐다.
◆쌓인 돈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적정 적립
문제는 적립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작 아파트가 낡았을 때 필요한 수선비를 충분히 모으지 못하는 것도 위험 요인이다.
부산연구원이 지난 7월 발표한 '공동주택 관리를 위한 부산형 장기수선제도 개선 방안'에 따르면 부산의 의무관리대상 공동주택은 이미 절반 이상이 건립 20년 이상의 노후 단계에 진입했다. 향후 5년 이내에는 약 65%가 노후 공동주택으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부산의 장기수선충당금 적립 수준은 전국 최저 수준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적정 적립기준의 부재와 공사비 산정의 어려움, 장기수선계획 검토·조정 과정의 전문성 부족 등을 문제로 지적했다.
아파트가 오래될수록 수선이 필요한 시설은 늘어나지만 이를 감당할 돈은 부족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당장의 관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립액을 낮게 유지하면 향후 대규모 공사가 필요한 시점에 주민들이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장기수선충당금은 많이 쌓여 있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적게 걷는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필요한 수선비를 적정하게 예측하고 계획에 따라 적립·사용하는 일이다.
제현정 부산연구원 연구위원은 장기수선충당금을 단순한 유지관리 비용이 아니라 공동주택의 자산가치와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미래 투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속 박해강은 처음에는 178억원을 빼돌리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 도전한다. 하지만 결국 주민들이 모아둔 돈을 지키는 인물이 된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의 주인인 주민들은 자신이 매달 납부하는 장기수선충당금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까.
관리비 고지서 속 작은 항목 하나가 수십년 뒤 아파트의 안전과 자산가치를 좌우할 수 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누군가가 대신 지켜주기를 기다릴 돈도, 당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작정 적게 모을 돈도 아니다. 주민들이 함께 모으고, 사용처를 살펴야 할 공동의 노후자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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