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김진욱 기자, 이수민 인턴기자] 미국 행정부가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주장에 잇따라 선을 긋고 있다. AI 위험은 기존 법과 기업 책임을 통해 관리하되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개발 속도 자체를 늦추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일랜드 둔베그에서 기자들과 만나 AI 기업 수장들이 제기한 ‘AI 속도조절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인 14일(현지시각)에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국이 AI 기업을 규제하고 위법 행위를 처벌할 수단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AI 개발을 늦출 경우 중국 등 경쟁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다.
JD 밴스 부통령도 AI 기업들이 정부에 규제를 요구하는 것을 '트로이 목마(Trojan horse)'에 비유하며 경계했다. 규제가 오히려 기존 대형 AI 기업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15일(현지시각)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청문회에서 AI 기업에 책임 면제(liability exemption)를 부여하는 데 반대하면서 중국보다 기술 경쟁에서 앞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같은 날 토드 블랜치 법무장관 역시 AI 관련 기업이 형법을 위반하면 수사하겠지만 법무부가 AI 산업 자체를 규제하는 기관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 AI속도조절론, 사실은 ‘사다리 걷어차기’?
AI 규제가 오히려 대형 업체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문제로 전이되는 모습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각) 앤드루 퍼거슨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은 AI 업체들이 새로운 규제를 요구하면서 반독점법 적용 예외까지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규제와 반독점법 적용 예외가 결합할 경우 신규 AI기업의 진입장벽이 될 수 있으며 기존 대형 업체가 경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이유다. 다만 퍼거슨 위원장은 해당 발언이 개인적인 의견이며 연방정부의 AI 정책은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AI 시장에서는 투자금이 소수 대형 업체로 집중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CB Insights)가 발표한 '2026년 1분기 AI 현황'에 따르면 글로벌 비상장 AI 기업 투자금은 2260억달러(309조9000억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오픈AI가 유치한 1220억달러(167조3000억원)가 전체의 54%를 차지했다.
오픈AI와 앤트로픽, xAI 등 상위 모델 개발사 3곳의 투자금은 약 1600억달러(219조4000억원)로 전체의 약 71%였다. 1억달러 이상 대규모 투자도 전체 투자금의 94%를 차지했다.
반면 투자 건수는 전분기보다 5% 감소했다. 전체 투자금은 늘었지만 자금은 더 적은 수의 대형 업체로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다. AI 투자금이 이미 소수 기업에 집중된 상황에서 규제 비용까지 늘어날 경우 대형 업체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다는 게 퍼거슨 위원장이 제기한 문제의식이다.
◆ 美 행정부의 ‘AI속도전’, 韓 HBM 수요와 직결
최근 국내 증시는 AI 개발 속도 논쟁에 민감하게 움직였다. 지난 14일 글로벌 AI 기업에서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AI 투자 감소에 대한 우려가 확산됐다. 당시 코스피는 3.3%가량 떨어졌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각각 4.05%, 6.35% 하락했다.
속도조절론에 충격을 받았던 국내 반도체주는 16일에 조금씩 반등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오전 11시30분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1.01% 오른 25만750원, SK하이닉스는 1.60% 오른 171만8000원에 거래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AI 기업의 투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오픈AI는 삼성전자와 차세대 반도체 개발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픈AI의 스타게이트(Stargate) 데이터센터에 메모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미국 AI 기업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줄어들 경우 국내 메모리 업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현재까지 실제 AI 인프라 투자 주문이 줄어드는 움직임은 뚜렷하지 않다. KB증권은 16일 보고서에서 미국 하이퍼스케일러(hyperscaler)의 2027년 AI 인프라 투자가 전년 대비 63% 증가한 1조3000억달러(1782조3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 시장 전망치인 1조1000억달러보다 오히려 늘어난 수준이다.
특히 미 행정부가 AI 개발 속도를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정책 측면에서도 급격한 투자 위축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실제 하이퍼스케일러의 투자 전망까지 상향되고 있다는 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우려를 일부 완화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AI속도조절론에 대한 외국인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지난 9일부터 15일까지 5거래일 동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쳐 10조2408억원어치 순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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