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사이트 이상균 IB부장] 지난 2010년 벤처캐피탈(VC) 업계를 취재할 당시만해도 연간 벤처투자 금액은 8000억원대에 그쳤다. 2000년대 초반 정보통신(IT) 붐을 계기로 벤처업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연간 1조원)와 비교하면 2000억원 가량 적었고 시장 분위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은 안개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2009년 리먼 브라더스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여전한 탓에 시장에는 활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VC업계는 이 때를 기점으로 고속성장 가도를 달렸다. 한해 벤처투자 금액은 이제 10조원을 넘어선다. 단순 수치로만 봐도 10배 이상 성장한 셈이다. 100개를 간신히 넘던 VC 숫자는 이제 280개를 상회하고 신기술금융사는 100곳 이상이다. 심지어 대기업조차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이란 이름으로 VC 설립이 가능해졌다.

VC에서 핵심인 벤처투자 업무를 담당하는 심사역의 양과 질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2010년 200여명에 불과했던 심사역은 이제 1700명이 넘는다. 한때 외부에서 심사역 충원이 어려워지자 같은 VC업계에서 인력을 빼가며 연봉 인상을 부추겼던 것과 달리, 이제는 다양한 분야에서 심사역 보강이 이뤄진다. VC의 주요 투자처인 산업계는 물론, 의료계, 학계, 교육계 등 범위가 넓어졌다. 석박사급 인력들도 즐비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호황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VC업계에 오히려 위기가 아른거린다는 사실이다. 요즘 만나는 VC 대표들은 한결같이 "2000년대 후반 입사한 VC 심사역의 경우 큰 어려움 없이 투자금 회수(엑시트)가 이뤄지다보니 위기의식이 전혀 없다"며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시장이 폭삭 가라앉으면 자신의 투자 실력과 무관하게 위기가 닥칠 수 있는데 이에 대비하려는 자세가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시장은 호황과 불황, 위기와 기회를 반복한다. 호황이 지속될수록 시장에는 거품이 잔뜩 쌓였다가 위기가 닥치면 한 순간에 거품이 사라지면서 깊은 골짜기로 추락한다. 사람들은 호황기에는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 믿고 불황기에는 불황이 계속될 것이라 믿지만 정작 시장은 정반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시기상으로는 2010년대 후반, 거품이 걷히면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둘러야 했지만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탓에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추가로 공급됐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 구조조정은 기약 없이 미뤄졌고 아직까지도 정책자금이 떠받치는 불안한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시장에 좀비기업이 난립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지만 정작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는 시도는 없다. 모두가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꺼리는 게 현실이지만 폭탄은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다.

호황기에 VC 심사역의 실력은 가려져 있다. 시장이 좋을 때는 펀딩과 투자, 엑시트가 수월하다. 적당히 심사역들끼리 어울리면서 투자기업 정보를 공유하고 보고서를 베끼며 클럽 딜에 참여하면 그만이다. 고민이 없으니 투자단위도 크다. 다 같이 함께라면 위기도 넘길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이 깔려있다.

불황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적당히'는 금지어다. 대충 투자한 기업들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투자금은 전액 손실이다. 면밀한 검토 없이 설정한 엑시트 계획은 나중에 자신의 목을 옭아매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무능력이 드러난 심사역은 소리 소문 없이 업계에서 사라진다. 그나마 연이은 실패를 통해 뼈저린 깨달음을 얻은 소수의 심사역들이 이를 악물고 버티며 에이스(ace)로 성장한다. 옥석이 가려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