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금융투자협회의 낡은 화장실
협회의 무관심에 방치된 낡은 제도···오일뱅크 회사채 사태로 이어져
이 기사는 2023년 06월 28일 08시 36분 유료콘텐츠서비스 딜사이트 플러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금융투자협회 건물 전경(제공=금융투자협회)


[딜사이트 백승룡 기자] 서울 여의도 샛강역 인근에 자리한 금융투자협회. 준공 30년을 향해 가고 있는 건물치고는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지만, 건물 내부는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건물 곳곳에서는 오래된 소파 향이 느껴지고 철문으로 된 화장실 문은 열릴 때마다 힘겨운 듯 '끼이익' 소리를 낸다. 국내 굴지의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거느린 협회의 검소한 모습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기적으로 협회장이 바뀐 탓에 주인 없이 세월을 맞은 건물의 현주소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한다.


협회의 '예스러움'은 화장실 철문에만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업계 곳곳에서 묻어난다. 최근 도마 위에 오른 것이 회사채 발행 과정에서의 증권신고서 제출 시스템이다. HD현대오일뱅크는 이달 1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해 지난 8일 수요예측을 진행, 8750억원의 매수자금을 받아 발행액을 2000억원으로 증액하기로 했다. 3년물 700억원, 5년물 800억원, 7년물 500억원으로 나눴다. 그러나 발행일 전날 공시된 확정 증권신고서에서 7년물 금리가 잘못 기재되는 오류가 발생했고, 해당 만기는 발행이 철회됐다.


7년 만기 500억원이 한순간에 증발되면서 HD현대오일뱅크의 조달금액도 1500억원으로 줄어들게 됐다. 공동 대표주관사로 참여한 KB증권·NH투자증권·미래에셋증권 가운데 공시 주관업무는 KB증권이 맡았다.


다만 단순히 주관사의 실수로 매듭짓기엔 속내가 조금 복잡하다. 회사채 발행금리는 수요예측을 거쳐 발행조건이 정해지고, 발행일 1영업일 전 민평금리에 이 발행조건을 적용해 확정된다. HD현대오일뱅크의 경우 7년물 발행조건이 -15bp로 정해졌고, 발행일 전날 7년물 개별민평금리(4.802%)에 이를 대입해 4.652%를 공시해야 했지만 4.649%로 오기재됐다. 짚어야 할 부분은 민간채권평가사들이 산출하는 민평금리가 오후 7시에 발표된다는 것. 현행 자본시장법은 회사채 발행일(청약일) 전일 오후 6시까지 발행액과 금리 등이 기재된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 간극 속에서 현재 주관사들은 4개 민간채권평가사에 전화 통화로 개별민평금리를 확인하고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마저도 오후 5시~5시 반이 돼야 유선 파악이 가능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가 6시에 마감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민평금리를 구두로 파악해서, 발행금리를 기재해 공시하고, 오기재 사항이 없는지 검토까지 마쳐야 하는 것이다. 이후 민간채권평가사들이 오후 7시께 민평금리를 발표하지만, 이때 숫자가 다른 것을 확인해도 이미 공시의 문이 닫혀 정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이번 HD현대오일뱅크의 회사채 일부가 불발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주관사에 있다. 다만 불확실한 정보로 공시를 마쳐야 하는 현행 시스템 또한 구조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민평금리 발표 이후에 증권신고서 공시가 이뤄지거나, 민평금리를 사전에 보다 명확한 방식으로 전달받는 등의 개선은 어려웠을까. 증권사  관계자들은 "증권업계는 은행연합회 같은 연합체가 없다. 금융투자협회가 있긴 하지만 워낙 회원사가 많아 증권사들의 목소리가 좀처럼 수렴되지 않는다. 10년 전 방식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쯤 되면 금융투자협회의 화장실이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검소한 탓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끼이익' 소리를 내는 낡은 화장실 철문이야 종일 열어두면 그만이다. 오래된 소파 냄새도 익숙해지면 맡기도 어렵다. 그러나 낡은 제도는 이번 HD현대오일뱅크 회사채 사태에서 보듯, 수백억원의 조달을 엉키게 할 수도 있는 리스크 요인이다. 이번엔 수백억원 규모지만, 회사채 규모는 많게는 단일 발행에 1조원을 웃돌기도 한다. 협회장이 3년간의 임기를 마치면 떠나는 구조 속에서 협회는 내부 환경은 물론, 회원사들의 고충까지 매번 뒷전으로 미뤄왔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눈으로 시장을 바라봅니다. 딜사이트 무단전재 배포금지

관련기사
기자수첩 834건의 기사 전체보기